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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여름통신
익모초, 그 지독하고 속 깊은 유혹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3/07/3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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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면 지동시장엘 간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작정한 바 없지만 어쩌다보니 빠지지 않고 여러 주째 가고 있다. 
길도 늘 가던 길로만 가게 된다. 통닭거리를 지나고 좁은 골목을 지나 간신히 주차하고는 곧바로 약초상으로 가 익모초 생즙을 마신다. 그리고는 어슬렁어슬렁 세상 구경하면서 시장을 빠져나온다. 그게 다다. 하지만 각별하다.
 
복장도 영아기를 제외하곤 내 생에 없던 불량복장이다. 끈 원피스를 입고 어깨며 등짝을 반에 가깝도록 드러낸 채 활보한 적도 있다. 물론 긴 머리로 등판을 슬쩍 가리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반으로 접은 큰 손수건을 어깨에 두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 있을 법한 일이던가.
 
삶터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동시에 익명성이 생겨 관계에 얽힌 시선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면 보장된 자유 또한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처음으로 맨발의 여름을 보냈던 때가 생각난다.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피어올랐다. 몸의 시원함이나 자유로움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의 자유로움이 내내 속에서 일렁거렸다. 단지 양말을 신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 따뜻하고 편안한 일렁임을 난 주름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에서야 처음으로 맛보았다.
삶은 순서대로 깨닫는 것도, 다다라야할 정해진 단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익모초를 마실 땐 무척 신중하다. 호흡도 조절한다.
이번엔 잡을 수 있을까, 온 신경을 혀 끝에 집중한다.
슬쩍 바늘 끝처럼 내 허방을 찌르고 달아나는 오묘한 그 무엇, 분명 쓴 맛 뒤에 알 수 없는 징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끝내 드러나길 거부한다. 아직도 읽어낼 수가 없다. 혀끝으로 읽어내야 하는데, 내 둔한 미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또 마신다.
 
이 또한 처음부터 작정하고 마신 것은 아니다. 마시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온 신경을 모아 무언가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물론 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고 위장도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그건 부수적인 문제가 돼버렸다.
 

무엇을, 왜 찾는 걸까.
어쩌면 쓴맛의 연속인 우리 생을 변명하거나 해독(解讀) 또는 해독(解毒)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쓴 맛 속에서도 생은 때때로 흐뭇한 미소를, 때론 박장대소를 선물하지 않는가.
 
난 고정(苦丁)차도 좋아한다.
苦차에는 혀에 착 감겨오는 기분 좋은 끝맛이 있다. 은근하고 달다. 산문이기보단 시에 가까운 맛이다. 은유다.
苦차는 그리 깊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조금만 맑은 기운으로 가다가도 자신을 열어 보여준다.
 
언젠가 苦차를 마시다가, 이렇다 할 신체적 변화를 느끼기도 전에 지레 눈물이 주룩 흘러버린 적이 있다. 함께 마신 사람들이 있었으니 분명 당황스러운 일일 터이나,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씩 웃고 넘어갔다.
내가 아니라 苦차가 그랬다.
그런 일을 치르면서 苦차는 온전히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익모초는 아직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잔을 들기만 하면 그 오묘하고도 깊은 맛을 채 헤아리기도 전에 지독한 쓴맛과 함께 알듯말듯한 여운만 남기고 서둘러 넘어가버린다.
 
얼마나 나를 더 홀리려는지, 또 나는 얼마나 더 홀려들고 싶은 건지…….
어쩌면 쓴맛 속에 감춰진 그 지독한 유혹 덕분에 삶이 조금은 더 건강하고 질겨질 것 같다.
 
손희경(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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