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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4] 반 고흐에게 인문학을 묻다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8/1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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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1885년 3월26일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갑자기 죽는다. 그는 하루만에 ‘아버지의 성경’을 그렸는데 한쪽에 에밀졸라 작품이 놓여있다. 반 고흐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노동 운동의 대표 자격인 에밀졸라를 표현한 것은 그동안의 아버지와의 많은 마찰을 통한 반감과 기독교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누에넨에 있는 동안 ‘마르호트베헤만’이라는 10살 연상의 여인과 진정한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마르호트는 결국 음독자살을 했다. 고흐는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 어려운 것은 상대방에게 사랑의 응답을 받는 것’이라며 누에넨을 떠난다.  

 

고흐가 떠난 후 고흐의 작품들은 기막힌 운명에 처해졌다. 그의 작품들은 한 잡화점에 맡겨져 방치되었고 1903년 쿠르빌에 약 400~500점을 통째로 넘겨졌다. 쿠루빌은 소묘 100점을 처분하여 큰 캔버스는 넝마장수에게 넘겼고 나체 소묘는 소각했고 나머지는 단골손님에게 주었다. 남은 것은 벼룩시장에서 장당 5~10센트에 팔았다. 이것들은 나중에 크릴 러뮐러 국립미술관을 조직한 인물인 ‘브레멀네이란트’가 몽땅 사들이자 품귀현상이 일어 숨은 고흐작품을 찾으려 혈안이 된다.

 

1886년 고흐는 유화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수업료가 없는 안베르펜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교장 겸 유화교사인 ‘베르라트라’는 고흐의 그림을 썩은 개라고 혹평했고 고흐는 2개월 만에 미술학교에서 쫓겨났다. 이후 동생 테오는 ‘화상’의 입장에서 고흐를 형이 아닌 ‘예술가’로서 지원을 결심하고 파리로 안내한다. 이때 파리의 앞 골목은 소위 잘나가는 화가들의 차지였고 고흐를 비롯한 가난한 화가들은 뒷골목 차지였다. 여기서 인상파들과 접촉하고 교류했지만, 그는 여전히 탈 인상파였다. 또한 일본 목판화 민속화인 우키요예를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때부터 고흐의 색감이 많이 밝아진다. 당시 파리는 기금의 우리 한류처럼 일본의 자포니즘이 유행이었고 많은 이들이 일본작품을 선호하였다. 고흐는 가난한 화가였지만 그럼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뒷골목 화가들을 위해 화가협동조합을 세우기로 한 고흐는 남프랑스로 떠난다. 협동조합의 목표는 화가들이 한 곳에 모여 생활비 등의 부담을 줄이고 누군가 작품이 팔리면 공평하게 분배해 서로의 기량을 연마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추자는 것으로 다분히 마르크스적이었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을 위해 부담없이 쉴 수 있는 집을 아를에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라고 쓰고 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을 준비하고 예술가들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이에 호응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고갱만이 아를을 찾아왔고 고독한 고흐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격과 예술관이 너무 달랐다. 고갱은 한적한 시골도시일 뿐인 아를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고흐는 고갱의 그림에 참견하고 결점을 지적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성격차이와 화풍의 부조화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결국 고갱은 2달 만에 떠나버리고 고갱이 떠남으로써 예술가조합이 무너지고 동생 테오의 혼담이 성사되며 송금도 그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현실 앞에서 고흐는 미칠 수밖에 없었다. 고흐는 작업실에서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 크리스마스이브에 라셀이 라는 창녀를 찾아가서 자신이 자른 귀를 선물이라고 건네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이튿날 이 가난한 정신 이상자를 그의 집 침대 위에서 발견했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 투우경기에서 승리한 투우사에게 최고의 포상은 소의 귀를 잘라 투우장을 일주한 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귀를 바치는 것이었다. 혹시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 당시 사랑하던 매춘부 라셀에게 건네 준 이유가 본인이 저 투우사처럼 승리자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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