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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산(18) - 비봉산, 세종대왕의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 산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8/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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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렬 시인, 화성시 문화원 향토 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비봉산(飛鳳山, 186.9m)은 남양동의 동쪽에 있으면서 천년 고찰인 봉림사를 품고 있는 산이다. 흔히 화성시청의 뒷산으로, 봉림사의 뒷산 정도로 알고 있다. 

 

태행지맥이 염티고개에 이르기 전 북양3리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비봉산을 세운다. 이 산맥은 계속해서 능고개(대광아파트 옆)를 지나 메주고개(시청에서 신남리로 넘는 고개)를 지나고 고초봉을 일으키다가, 북동에서 남서로 약 5km를 뻗어 내려가서 신남리 매호동의 남양천에서 맥을 다한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무봉산(舞鳳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혼란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도 ‘비봉산’으로, 최신의 구글지도에서도 ‘비봉산’이다. 다만 1911년에 발행된 ‘朝鮮地誌’에서는 봉림산(鳳林山)으로 나와있는데 이는 사찰 봉림사가 있어 그리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봉림사 창건 유래를 보더라도 신라 진덕여왕 때(서기 650년 전후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경기도 한강 유역 일대에서 영토전쟁으로 늘 혼전을 벌이던 시대이다.) 호국 사찰로 짓게 되었는데 궁에서 기르던 새가 날아왔다고 하여 절 이름을 봉림사로, 그리고 이 산을 비봉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봉황이 춤을 추었다고 하여 무봉산(舞峰山)이라 함은 더 비약된 과장이라 본다. 현지 주민들도 대체로 비봉산으로 알고 있음을 볼 때 ‘비봉산’이 더 정통성 있어 보인다.

 

전국적으로도 비봉산은 여럿이 있는데 봉황과 관련된 설화나 상서로움이 있어 붙여진 이름들이다. 鳳非梧枝不棲 鳳非竹實不食(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살지 아니하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아니한다)하며 오로지 감로수(甘露水)만 먹고 산다는 상념적인 새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 信)의 오상(五常)을 갖추고 날아오르면, 뭇 새들이 따라 오르는 새 중의 왕으로 ‘봉은 임금 황은 왕비’를 상징하지 않는가. 

 

비봉산은 남양에 시청이 들어오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생김으로써,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생겨났다. 

들머리만 말하면, 봉림사, 시청 청사의 뒤, 대광아파트 단지, 신빈 김씨 묘역, 택지 공원, 신경대학 뒤, 무송동, 등이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은 아무래도 택지공원이며 여기에는 운동기구와 게이트 볼 실내경기장이 있어 시설은 가장 잘 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들머리의 어느 곳에서나 산에 들어오면 되고 어느 곳으로나 나가면 된다. 교통편을 고려하여 산행계획을 짜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주의해야 할 곳은 봉림사 북쪽에 있는 정상에 가는 일이다. 봉림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안내판이 있고 100여개의 계단이 있어 오를 수 있다.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그러나 안내판에서 북양리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이 두 군데 있다고 하는데 내려가면 낭패를 보게 된다. 북양리는 공장지대이고 산기슭에까지 공장 건물과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갈 수가 없다.(필자는 길을 찾기 위해 두 시간을 헤매었으나 길은 없었다.) 

 

필자가 가장 좋은 코스라고 여겨지는 길을 소개 하고자 한다. 봉림사에서 출발하여 시청 방향으로 전진하여 남봉(시청 뒷산)을 거쳐 택지공원 내려가기 전 전망대, 다시 뒤돌아서 남봉에서 신빈 김 씨묘로 내려오면 온전히 종주코스가 된다.

 

봉림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바로 안내판이 있고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산 전체로 보면 능선 중앙에 국가시설물이 있기 때문에 산기슭으로 길이나 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20여분 천천히 오르면 정상 1.00km, 봉림사 0.98km 라고 쓴 이정표를 만난다. 계속 전진하다보면 정상 부근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빈집이 한 채 나오고 곧 대광아파트로 가는 길을 만나고 이를 지나면 운동 기구가 설치된 남봉 정상에 오른다. 봉림사에서 30분이면 충분하다. 

 

여기에서는 서쪽으로 택지공원, 남쪽으로는 신 빈김씨 묘로 갈라지며 택지공원 방향으로 400m 쯤 가면 시청 방향과 전망대로 가는 길로 또 갈라진다. 전망대에 이르면 남양동 시가지가 전부 조망이 되며 멀리 서해 바다와 냠양동 뒤의 태행지맥 산맥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택지공원에서 올라와 잠시 쉬기도 좋은 곳이다.

 

다시 돌아서서 남봉으로 와서 남쪽으로 난 길로 내려간다. 10분이면 신빈의 묘에 다다르며 산행을 종료한다.

 

잠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를 생각해 본다. 

세종은 아내 소헌왕후를 지극히 사랑한 인물로 태종의 외척 척결(아버지 심온 등은 죽고 어머니와 친족은 관비가 되었던 사건)로 왕후가 폐비가 될 위험에 처했을 때, “공비(소헌왕후)없이는 왕의 자리도 필요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었다. 그는 젊은 시절 후궁을 많이 두라는 태종의 조언에도 소헌왕후의 마음을 고려해 신중히 거절했고 아내가 찾아오면 언제나 일어서서 맞이하고 중요한 일은 가장 먼저 상의하며 군주를 뛰어넘은 애처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왕이었다. 그리하여 슬하엔 8남 2녀를 두었으니 조선 왕실사상 국모가 그렇게 다산을 한 사례는 없었다. 소헌왕후가 죽은 후에도 세종은 계비를 들이지 않았다. 

 

이어 미천한 신분이었던 신빈김씨가 총애를 받게 되는데 신빈은 12년 동안 8명의 아이를 낳으며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빈이 이렇게 많은 자식을 낳은 예도 드물다. 조선의 신데렐라였다. 세종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지만 신빈도 그에 못지않다.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왕과 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어린 수양대군을 돌보며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세종은 그녀를 위하여 “출신은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여 정1품 신빈(愼嬪)에 책봉하기를 논하라”고 하여 신하들의 동의를 구하는 장면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죽자 신빈은 머리를 깎고 자수궁에 머물면서 죽을 때까지 14년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임금과 죽은 왕실가족의 명복을 빌면서 지냈다.

 

1464년(세조10) 59세를 일기로 죽었다. 큰아들(계양군)의 후손은 번성하여 서신면 백미리 웃말 등 여러 곳에 묘역을 이루고 있다.

 

비봉산 산행을 마친 후 시청 옆의 신빈 김씨의 묘에 이르면, 세종대왕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배려를 한 번쯤 되새겨 보며 고개를 숙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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