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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 전문가칼럼 화성춘추(華城春秋) 8] ‘이조잔영’과 ‘딜쿠샤’의 제암리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9/04/0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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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 화성신문

일본에는 ‘식민지2세 작가’라는 말이 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일군의 작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지야마 도시유키도 그중의 하나다. 1967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소개된 ‘이조잔영’의 원작자인 그는 제암리 학살을 다룬 유일한 일본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조잔영’은 조선의 미에 매혹된 미술교사 노구치와 기생 김영순을 축으로 전개되는데 1919년 3월 28일 송산, 서신면 주민들에 의해 처단된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와 성이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희미해져가는 조선의 미를 화폭에 담고자하는 노구치의 청에 못 이겨 마음을 열던 김영순은 노구치의 아버지가 발안장수비대의 수비대장이라는 것을 알게된 뒤 모델의 청을 거절한다. 

 

몰락해가는 조선의 전통과 풍습을 심미적으로 대상화하는 이 소설이 제국주의적 심상지리로부터 마냥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측의 ‘조선소요경과개요’를 인용하며 제암리 사건을 학살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대목은 ‘식민지2세 작가’로서 군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했던 작가의식과 겹친다.

 

3.1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들 가운데 SRT 동탄역 로비의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로 알려진 ‘프랭크 스코필드 특별전’을 보고 오면서 인왕산 자락의 ‘딜쿠샤’에 문득 마음이 머물렀다. 힌두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딜쿠샤’는 스코필드를 돕기도 했던 앨버트 W. 테일러의 가옥이다. 광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를 따라 온 테일러는 ‘딜쿠샤’에 머무는 동안 독립선언서를 A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렸고, 제암리의 학살을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가 하면 학살을 부정하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찾아가 자신이 찍어온 사 진들을 제시하며 학살 중단 결정을 이끌어내어 보도하기도 한다.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테일러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의 30년 동안의 서울살이를 기록한 책 ‘호박목걸이’엔 3.1 혁명 전야에 태어난 아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을 한 뒤 혼수상태에서 겨우 깨어나 아기를 보기 위해 눈을 뜬 산모에게 간호사가 품고 온 것은 아기가 아니라 종이뭉치였다. 간호사는 일경을 피해 산모의 침대 이불 밑에 종이뭉치를 숨겨놓았다. 그것이 독립선언서였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기자가 된 남편은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린리 테일러의 유머러스한 표현에는 아기보다 독립선언서를 더 감격스러워했던 부군에 대한 서운함과 동시에 은근한 긍지가 담겨 있다. 테일러는 바로 그날 밤 독립선언문 사본과 기사를 동생의 구두 뒤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게 된다. 백년 전 봄날을 제암리를 오가며 지낸 그들 부부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고 ‘딜쿠샤’는 이내 잊혀졌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지혜를 빌려 ‘붉은실’을 풀면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그 실을 따라 다시 나옴으로써 악명 높은 미궁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알프레드 노벨에게 노벨상의 영감을 주었다는 베르타 폰 주트너는 평화운동의 내용과 사건 그리고 인물들을 아우르고 이어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붉은실’을 이야기했다. 3.1혁명 연구자인 호프 메이는 최근 한 학술회의에서 기미독립선언서 사전 인쇄를 발견한 조선인 형사가 이를 눈감아 준 대가로 처형에 이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와 같은 개인적 변 혁의 순간이 바로 양심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붉은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조잔영’은 노작문학관에서 창간하는 잡지를 통해 곧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고, 방치되어 있던 ‘딜쿠샤’는 최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제암리 의거 백주년을 목전에 둔 우리 지역이 민족주의적 경계를 넘어 흩어진 저마다의 서사들을 하나로 잇는 ‘붉은실’의 본고장으로서 개인적 변혁의 순간과 연대의 삶을 오늘에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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