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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② 밭갈이
풍속은 그렸지만, 현실보다는 희망을 그렸다
 
주찬범 향토작가 기사입력 :  2019/04/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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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이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밭갈이>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찾기

 

① 쇠스랑질을 하는 농부와 쟁기를 끄는 소의 발이 흙속에 빠졌다. 밭에서 논갈이 작업을 하는 듯, 논에서 밭갈이 작업을 하는듯한 모순된 설정이다. 

 

② 세 발과 네 발 쇠스랑을 함께 사용한다. 동시대 농학자 서유구(1764년~1845년)는 <<임원경제지>> 중 <본리지>에서 조선은 세 발 쇠스랑만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네 발 쇠스랑은 관찰력을 시험하는 함정이다.

 

③ 소와 쟁기의 연결 방식이 부정확하게 묘사됐다. ‘멍에’와 ‘물추리막대’가 없으며, 이를 연결하는 ‘봇줄’도 없다. 김홍도의 1795년작 <행려풍속도병>의 <춘일우경>(그림 1), 1796년작 <<단원절 세보첩>> 중 <경작도>(그림 2)와 비교하면 확인된다.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의도된 오류이다.

 

④ 멍에 또한 소 한 마리가 끄는 ‘호리쟁기’처럼 구부러졌다. 소 두 마리가 끄는 ‘겨리쟁기’의 멍에는 개항 이후 풍속화가로 활동한 김준근의 <<기산 풍속도첩>> 중 <밭갈이>(그림 3)에서 보듯 ‘一’자를 사용했다. 

 

 

■ 잡설. 정조 시대 소가 많았나?

 

사람과 소의 발이 푹푹 빠지는 땅임에도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끈다. 논이나 토질이 부드러운 평지에서는 한 마리, 땅이 척박하거나 경사가 심하면 두 마리가 끄는 것이 상례였지만, 정조 시대에는 농사일에 동원할 소가 절대 부족했다. 축산업이 발달하지 않았고, 소고기만 편식하는 식습관 때문이었다. 여북하면 1783년 고위관료 홍양호(洪良浩 1724년∼1802년)는 모자라는 소를 보충하기 위해서 당나귀와 양을 수입하자는 상소까지 올렸다. 

 

“말과 소를 보호하기 위해 당나귀와 양을 사육해서 대체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임금도 함부로 소를 잡지 않았지만, 손님접대와 제사음식을 차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도살하고 있습니다. 번식이 용이한 동물임에도, 농사철만 되면 쟁기질할 소를 구하지 못해 걱정입니다. 양을 사육해서, 양고기를 먹는 습관을 들이면, 쟁기질할 소가 남아돌게 됩니다. 양은 흔한 가축이지만, 사육하기도 쉽고, 가죽·털·내장·뿔 등과 같은 부산물 모두를 이용 합니다. 사행(청나라 연행사절단)을 다녀올 때 조금씩 사다 번식시키면, 연간 소 1만 마리 정도의 도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 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한 홍양호의 상소문>, <<정조실록>>, 1783년(정조 7)년 7월18일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청나라 사람들의 식생활과 비교하며 조선인의 유별난 소고기 편식 습관을 언급했다. 

 

“이 곳(북경)에서는 소도살을 금한다. 황성 안에 돼지 고깃간이 일흔두 개소 있고, 한 곳에서 삼백마리쯤 판다. 양 고깃간은 일흔 개소인데, 이 또한 돼지고기와 마찬가지로 팔린다. 소고기간은 단 세개소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오백 마리가 죽는다.” 박제가 <<북학의>>, 이익성을 유문화사, 제2판, 2011. 홍양호와 박제가의 주장대로 양은 사육이 용이한 동물임에도 축산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요즘이야 ‘양꼬치’가 대중적인 먹거리로 자리 잡 았지만, 당시만 해도 조리법이나 요리에 필요한 향신료가 함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학(청나라 선진문물을 도입해서 가난과 낙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도입에 디테일이 부족했 음을 시사한다.

 

참고로 서울에는 쇠고기를 파는 곳이 23개소가 있었다.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10 <<동국여지비고>> 1785년(정조 9) 서울의 인구를 2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쇠고기 정육점은 인구 1,000명 당 1개소 정도로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소 부족현상을 감안하면, 소 두 마리가 쟁기 질을 하는 도상은 당시의 보편적인 풍속이라기 보다는 농민들의 희망이 아니었나싶다. 

 

주찬범 향토작가(news@ihsnews.com)

 

 

▲ <<행려풍속도첩>> 중 <춘일우경> 부분, 김홍도, 177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단원절세보첩>> 중 <경작도> 부분, 김홍도, 1796년, 호암미술관 소장     © 화성신문

 

▲ <<기산풍속도병>> 중 <밭갈이>, 김준근,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참고 그림) 쟁기의 부분 명칭도, ‘쟁기와 벡터 원리’     ©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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