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오피니언 > 칼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조영호교수의 Leadership Inside 94] 공격형 리더 김우중 회장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9/12/16 [09:24]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화성신문

대우그룹을 만든 김우중 회장이 지난 12월 9일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걸 남겼다. 1963년에는 한성실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켰고, 4년 후에는 31세의 나이에 아예 독립하여 수출만으로 회사(대우실업)를 성장시켰다. ‘대우신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4년에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수필집을 펴내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세계경영’이라는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대우는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이러한 행보는 칭기즈칸에 비견된다 하여 김 회장은 ‘김기즈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기업의 인수합병을 통해 대우의 몸집은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건설, 자동차, 전자, 조선 등 주요 산업분야에서 모두 사업을 펼치는 재벌이 되었다. 대우가 인수한 회사는 대개 부실기업이었으나 대우가족이 된 이후 이들 기업은 모조리 몇 년 내에 수십 배의 성장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대우는 순식간에 삼성, 현대와 맞먹는 재계 톱 그룹이 되었다. 1999년 대우가 해체되기 직전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갖고 있었고, 임직원 수는 국내 10만 명, 해외 25만 명에 달했다. 

 

이렇게 화려한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대우의 차입금은 29조원(1997년 말)에서 44조원(1998년 말)으로 늘어났으며 기업회생절차(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21조원이라는 공적자금이 대우그룹의 계열사를 정리하거나 살리는데 소요되었다. 결국 그 공적 자금은 국민세금이었던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김우중 회장과 대우경영진의 분식회계가 드러나 개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17조원이라는 세금추징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김우중 회장은 해외 도피생활까지 했고, 귀국하여 교도소에 복역하는 불명예를 겪었다. 그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 불명예를 회복하지 못 하고 실패한 경영자로 눈을 감았다.

 

김우중 회장은 아주대학교와도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아주대학은 1973년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설립을 맡은 사람은 박창원 전 경기도지사였다. 그는 정부 인사의 간청을 받고 한국과 프랑스간 외교적으로 중요한 이 학교를 운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을 운영하는 것이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박창원씨의 역량으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1977년 김우중 씨가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하여 아주대학교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우학원은 거제에 조선공학 전문대학과 대천에 자동차공학 전문대학도 함께 운영하였다. 대우그룹이 건재할 때 아주대학교는 대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대우가 해체된 이후에 이런 후광을 가질 수 없었고 스스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우학원’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주대학을 경영하고 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지한 곳이 아주대학교 병원이며, 장례식도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치러졌다.

 

김우중 회장은 아주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특강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쉬지 않고 일만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일을 안 해 본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에요. 일을 제대로 한번 해 보세요. 일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다고 그래요. 저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서 합니다. 이 재미있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다른 데 눈을 팔 수가 없어요.” 그는 정말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일에 몰입하는 스타일이었다. 휴가가 없음은 물론이고, 잠도 쪽잠을 자고 화장실에서도 결재를 했다 한다. 그는 뭐든지 열심히 하면 도가 트인다고 늘상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했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 남이 안한 일을 했으며 남이 못 간 곳을 갔다. 위험이 많은 곳이 그에게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와 구소련 동구권에서 비즈니스를 많이 했다. 북한과도 수없이 접촉하고 거래를 했다. 김우중 회장을 보필했던 대우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너무 빨리 달리기 때문에 뒤에서 따라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공장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금방 끝냈는데 벌써 생산품에 대한 판매 물량을 따오는 분이었다. 아니 기술도 없고, 공장도 없는데 판매처부터 확보한 세일즈맨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성취지향적이며 공격형의 리더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경제관료들은 긴축을 하고 구조조정을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김우중 회장은 투자를 해서 수출을 늘려 달러를 벌고 그 돈으로 IMF 빚을 갚자고 주장했다. 거기서 큰 마찰이 생긴 것이다. 기업가형 리더는 당연히 공격형이다. 그러나 지나친 공격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김우중 회장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이 아닐까? 

 

choyho@ajou.ac.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