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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초대석] 강신기 ㈜우양이엔지 대표, 들이대 정신·자존심이 피운 꽃 ‘집진기 선구자’
“사업 그만 접자” 사장 명령, 밤새 술 마시고 “못 접겠습니다”
25년 간 산전수전 겪으며 ‘대기환경전문분야 거목’ 우뚝
‘낙동강 오리알’ 신세서 회생, ‘집진기사관학교 교장’ 별명
심훈 상록수, ‘억세게, 사내답게 미래를 맞으라’ 가슴에 새겨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0/01/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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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기 대표가 회사 CI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 화성신문

 

 

술 마셨냐?”

 

, 마셨습니다.”

 

왜 마셨냐?”

 

사업 접으라고 하셔서 마셨습니다. 밤새 생각했습니다. 사업 못 접겠습니다.”

 

사업을 접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봐. 나를 설득해 봐라.”

 

199112월 어느 날 서울에 위치한 우양정공이라는 회사의 사장실 안 풍경이다. 오늘날 집진기사관학교장으로 불리는 강신기 우양이엔지 대표가 29년 전 첫 입사한 회사 사장실에서 사장과 마주앉아 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신입사원 강신기는 19911월 입사해서 상품기획팀에 들어갔다. 처음 맡은 업무는 홍보기획. 한국경제와 매일경제, 각종 잡지사와 거래를 많이 했다. 회사 상사가 강 씨에게 집진기 아이템이 담긴 일본 카탈로그를 던져주면서 시장조사를 시킨 게 집진기와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얘가 사업 못 접겠단다. 1년간만 더 해봐라

 

“91년도 3월부터 시작해서 일곱 대 팔았어요. 9112월에 전체 품목별 회의를 하는데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사업 접으라고.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7대밖에 못 팔았지만 1년 동안 뛰어다니다 보니까 분명히 되는 아이템인데 사장님이 미래를 보지 못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포장마차에서 혼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어요. 열정을 다 쏟았는데 너무 아까운 거예요. 새벽 4시까지 마셨어요. 사우나 가서 샤워하고 눈 좀 붙인 후 830분에 출근했어요. 사장님이 10시쯤 출근하셨는데 사장님 방으로 술 냄새 풍기며 밀고 들어갔어요. 위로 과장 차장 부장이 있었는데 보고 계통 무시하고요.”

 

직원 강신기는 사장에게 사업을 접을 수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기술력이 없고, 둘째, 시작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셋째, 앞으로 문화가 발전할수록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어 확실히 되는 아이템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는 최소 6개월의 시간을 더 줄 것과 사업비 3000만 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사업비는 홍보에 쓸 요량이었다.

 

사장님이 인터폰으로 영업부장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영업부장에게 얘가 사업 못 접겠단다. 1년간만 더 해봐라그러시는 거예요. 그 순간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정말 미친듯이 열심히 일했다. 1992년도에 70대 팔았다. 그 이듬해부터는 매년 판매량이 두 배씩 늘었다. 19954월 퇴사할 무렵에는 판매량이 월 60대에서 80대 정도로 늘었다. 그 당시로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숫자였다. 한 대당 가격은 그 당시 돈으로 300만 원에서 500만 원이었다.

 

 

▲ 집무실 책상에 앉아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강 대표.     © 화성신문

 

 

“5년 정도 근무하다보니까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전국에 있는 대리점들 관리하는 것 보다 내가 직접 현장에 뛰어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당시 대리점들은 컨베이어 벨트, 타이밍 벨트 같은 품목을 취급하는 대리점들이었는데 집진기 아이템에 큰 관심을 갖는 대리점이 없었거든요. 집진기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대리점을 열면 회사도 좋고 나도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리점으로 승부 걸겠다는 비전을 품고 입사 5년 차에 사표를 제출했죠. 그런데 그게 고난의 시작이었어요.”

 

직원 강신기는 사장이 자신을 믿어주고 큰일들을 맡겨주었기에 당연히 대리점을 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산이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사표를 제출하자 사장이 괘심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때 사장님이 저를 많이 믿었어요. 집진기 사업 분야뿐만 아니고 개인적인 비서 형태의 업무도 같이 했었거든요. 해외 갈 일 있으면 꼭 같이 데리고 가셨어요. 많이 예뻐해 주셨지요. 그렇게 믿고 있던 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던졌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배신감을 느꼈겠지요. 제가 회사를 운영하다보니 알겠더군요. 믿었던 직원들이 나가고, 또 그렇게 나간 직원들이 동종 업계 사업체를 차리고 하는 걸 수없이 겪다보니 그때 사장님이 그런 기분이었겠구나 느껴지더군요.”

 

19954. 대리점을 내줄 줄 알고 사표를 던졌으니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 버렸다. 이미 사무실 계약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그해 626일자로 사업자등록증을 받았지만 막막함 그 자체였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공부한 게 다인데. 2개월 정도 방황하며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지? 나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어요. 고민 끝에 어차피 일을 벌였으니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사무실은 서울 신림동에 있었지만, 작업장이 필요해서 지인을 통해 김포 어느 공장에 2평 정도 공간을 얻었다. 포터블 집진기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한두 대 만들어가지고는 월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무실 경비도 안 나왔다. 그래서 규격화된 집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진기를 만드는 회사들이 꽤 있었는데 오더 메이드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소형제품을 사용하고 싶은 회사들은 가격대가 안 맞는 겁니다. 규격화 시켜서 싼 가격으로 시장에 내 놓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규격화된 집진기를 설계해서 제품화했죠. 규격화를 시키니 생활이 한결 나아졌어요.”

 

 

▲ 우양이엔지가 제작한 사이클론 일체형 백필터 집진기.     © 화성신문

 

 

내가 도와줄 테니 계좌번호 불러라

 

1년 후인 1996년 여름에 광명시 과림동에 50평 건물로 옮겼다. 주문이 쏠쏠하게 들어왔다. 강 대표가 시장 분석을 통해 흐름을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팅은 회사 연감을 활용했다. 연감에 있는 회사 중에서 집진기를 사용할 만한 회사들을 찾아서 전화로 연락하고, 가능성이 보이면 제작해 놓은 집진기를 일단 갖다 주었다. 3분의 1 가격 수준에 품질도 나쁘지 않아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DID(들이대) 정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다시 1년 후인 97년 여름, 구로공단에 100평 공장을 얻어서 이전했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300만 원이었다.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는데 느닷없이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IMF 사태가 터진 것이다.

 

납품하고 설치해 놓은 것들이 전부 부도났어요. 내가 어음에 자서를 해줬으니까 돈을 줘야 할 것 아녜요. 통장에 있는 돈 다 빼서 주고 나니 직원 월급 줄 돈도 없었어요. 직원 다섯 명 중에서 두 명 정도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뒤도 안쳐다보고 가버리더군요. 내 월급은 안 받더라도 어떻게든 직원들 월급 맞춰주었는데 정말 냉정하더군요. 통장에 100만 원 밖에 안 남았어요. 보증금 3 000만 원도 다 까먹었어요.”

 

강 대표는 사업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끝낸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결국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제일 싼 공장을 찾다가 인천으로 옮겼다. 70평 규모였고, 보증금 1,500만 원에 월세 150만 원이었다. 강 사장은 2,000만 원이 필요했다.

 

어려울 때 구세주가 나타나는 법이다. 홍보기획 업무를 맡았을 때 형처럼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잡지사 부장이었던 그 사람도 회사를 나와서 산업계 포탈사이트 다아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계좌번호 불러라.”

 

형님, 돈 떼일 수도 있어요. 이자는 더더군다나 못 드립니다.”

 

알았으니 마음 바뀌기 전에 계좌번호나 빨리 불러라.”

 

그날 통장을 확인해보니 약속대로 정말 2,000만 원이 꽂혀있었다. 강 대표는 인천 공장 주인에게 말했다. 자금이 부족해 500만 원 선금으로 걸고, 나머지 1,000만 원은 3개월 후에 주겠다고. 그랬더니 인천 공장 주인은 고향이 어디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등 두 시간이나 빙빙 돌려가며 이야기를 한 후에야 답을 주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사람이 진솔한 것 같은데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지 뭐. 한 번 해 보슈.”

 

 

▲ 전기집진기.     © 화성신문

 

 

강 사장은 그렇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잡게 됐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안자고 열심히 일했다. 김포 집에서 인천까지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회사에서 몇 개월을 숙식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밤에는 바닥에 방음스펀지 깔고 전기난로 하나 켜놓고 잠을 잤다. 몸이 지치니 안면에 마비가 왔다. 회사에서 마케팅을 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으니 마스크 끼고 모자 쓰고 영업을 다녔다. 운전은 IMF때 실직한 친형이 해줬다. 다행히도 회사는 성장했고, 얼굴 마비 증상도 사라졌다.

 

2001년도에 시화공단 3마 지역에 있는 500평 규모의 공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 즉석에서 계약했다. 회사는 불같이 얼어나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5개월 후에는 3바 지역에 있는 500평 공장 부지를 분양받았다. 3마 지역 공장은 임대를 주고, 3바 지역 부지에 공장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 500평 공장에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감이 밀려들고, 공장 고(, 높이)가 낮아 주문이 들어와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전한 곳이 현재의 화성시 남양읍 현대기아로에 위치한 1,980평 규모 공장이다. 호이스트 거치대도 5톤부터 30톤까지 6개가 걸려 있다. 이제 고()15m로 웬만한 기계들은 다 만들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 우양이엔지 회사 전경.     © 화성신문

 

 

강신기가 이야기하면 100% 다 믿어

 

우양이엔지는 25년의 세월을 거치며 대기환경전문분야 거목으로 우뚝 섰다. 지난해 6월부터 환경산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강신기 대표의 별명은 집진기사관학교 교장이다. 회사 운영 25년의 세월동안 강 대표에게서 배운 기술로 설립된 회사가 12곳에 이른다.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2001년도에 시화공단으로 이사 온 후 영업 생산 무역 설계 파트 핵심 인력 4명이 거의 동시에 빠져 나갔어요. 알고 보니 그 네 명이 영업 직원의 형이 운영하는 회사로 갔더군요. 배신감에 치를 떨었죠. 그때 실의에 빠졌어요. 주변에서 들려오는 강신기 시대는 갔어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죠. 자존심이 다시 일어서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매출액도 201760, 201880, 2019년도 106억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는 150억을 목표로 세웠다.

 

대기오염방지시설 업체로서는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각종 규격화된 집진기는 우리가 처음 만들었죠. 큰 설비보다 규격화된 설비들이 더 복잡하고 힘들어요. 그러니까 웬만한 큰 설비는 규격화 기술로 모두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우양이엔지의 강점은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각 오염물질 처리에 적합한 맞춤형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 대표는 충남 아산테크노밸리에 1,640평 규모의 공장을 가지고 있다.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OLED 부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1년 전부터 사업화를 진행해왔다.

 

바를 정자, 길 도자. 정도의 길만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사람도 아니에요. 하하. 약속은 철저하게 지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요. 주변사람들로부터 강신기가 이야기하면 100% 다 믿는다’, ‘강신기는 문서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요. 제대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낚시를 좋아한다는 강 대표의 말투는 투박하면서도 구수하다. “우리 회사 직원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그의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제 사전에는 성공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최선이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죠.”

 

강 대표는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과거를 돌아다보고 슬퍼하지 마라. 그 시절은 결단코 돌아오지 아니할지니. 오직 현재를 의지하라. 그리하여 억세게, 사내답게 미래를 맞으라.’

 

우양이엔지의 세 가지 사훈도 강 대표를 닮았다. 기본에 충실, 분야의 최고, 나보다 우리. 강 대표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라고.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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