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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6주년 기획] ‘화성작가회의’ 시인들의 눈으로 본 화성-파도소리, 아픔도 기쁨도 기억하리니!
 
김중근기자 기사입력 :  2020/06/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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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은주 시인 2013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시집 『미안한 연애』 등     © 화성신문

이름을 돌려주고

 

십여 년 전 동탄신도시의 입주민이 되어 화성에서 살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어디 사느냐”라는 질문에 ‘화성’ 대신 ‘동탄’이라 말했다. 화성이라고 하면 ‘그 무서운 동네’라는 반응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십대를 보낼 때 화성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났다. 고향 집을 떠나 도시에서 유학을 시작하던 그 시절, 간간이 들려오던 끔찍한 이야기.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라 하였고 이런저런 괴담들이 쏟아졌다 그로 인해 어쩌다 늦는 귀갓길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두 잘 알다시피 그 사건은 영화로 제작되어 또 한 번 세상에 알려졌는데 영화 속 송강호가 들여다보았던 농수로를 일부러 찾아가 들여다본 것은 나에게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곳은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냥 농수로였다. 

 

드디어 지난해 숨어있던 범인을 찾아냈다. 범인이 잡히자 그 사건은 호출되어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같은 연배 남성은 삼십 년 전, 그때의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사건이 정서적으로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10차례에 걸쳐 대부분 목이 졸려 살해된 사건의 대상이 모두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랬다면 우리는 기억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삼십여 년 동안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 화성은 연쇄살인사건을 이춘재에게 돌려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불리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의 효심과 개혁사상으로 시작된 빛나던 화성은 삼십여 년 동안 오염된 이름을 어떻게 벗겨 낼 수 있을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한 달 전쯤 대구는 “대구 코로나라고 부르지 마라”고 분노했다. 어느 누가 나쁜 이름을 원할까? 한번 찍힌 이름, 그것은 이름일 뿐 삶은 그 안에서 모두 신성하다. 이춘재가 망가트린 피해자의 가족들도, 코로나가 망가트린 수많은 가족들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살아내야 하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름을 돌려준 지난해에 화성작가회의가 결성되었다. 화성의 삶은 이어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이제 화성이란 이름을 어떻게 쓸까?

 

 

 

 

▲ 임서원 시인 2015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화성신문

반석산 에세이

 

단추 끄르듯 샛길 끄르면 연인처럼 와락 달려드는 숲

수풀수풀수풀 낙엽 밟는 소리가 산 근처 건물 짓는 소리를 재운다

 

십 수 년째 차고 시리게 몰려오는 도시

산은 엄마 잃은 애기처럼 몸 움츠렸을 테지

  

움츠려 품어낸 조팝나무 쥐똥나무 찔레꽃 부처꽃 도롱뇽 부전나비 밀잠자리... 이런 식이면 해 넘어갈듯해서 그만 두지만

 

그만 둔 시를 놓고 잠든 홍사용 묘지 근처

청설모가 물어다 나른 문장을 연리목 쉼터 평상에 펼치면 

소쩍새와 꿩의 울음소리는 시가 되므로 몇 편의 시를 읽는다

 

                            읽다 어릴 적 기억의 샛길에서 

                            오래된 약속처럼 길을 잃는다

 

                            길 끝에서 한 줄 문장을 만지작거리다 만난 청설모에게

                            -너는 어느 문장에서 나왔니? 

                           청설모보다 먼저 다른 기억으로 건너뛴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에 부엌문을 열어보니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고 있었어. 

                           무장애길 벤치에 십년쯤 떨어져 앉은 할머니가 옛날 얘기를 시작하신다

 

                          이야기 끝쯤에 길을 잠가 기억을 가둔다

                          사라짐과 잊혀짐 그 간극사이를 붙들고 있는 반석산에 오르면

                          내 안의 내륙 아주 오래된 약속이 있다

 

 

 

 

▲ 박소원 시인 2004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 등     © 화성신문

 동탄에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타지에서 흘러온 이웃과 자주 

 눈인사를 나누며 스쳐가지만 

 

 이 길 위에서, 나는 당신이 모르는 사람

 당신도 언제나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흰 눈을 맞으며, 반듯한 신도시 길을 걸으며

 내가 걸어온 모든 길들 

 

 가슴 아픈 소식들 눈 속에 묻어둔다 

 길에서 나는 소리들 눈의 아픔이 되도록

 

 이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발자국들

 논과 밭과 옛 집터와 

 옛사람들 모두 사라졌다

 

 잊고 살자는 말, 고드름처럼 얼고 있다 

                                             얼어붙은 바람을 따라 걷다보면 

 

                                             네온사인 반짝이는 도심에 이르면

                                             사라진 시간들, 얼굴들 논밭들   

 

                                             내 발 밑에서 뽀드득 눈의 신음소리로 터진다

 

 

 

▲ 김명은 시인 200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사이프러스의 긴 팔』 등     © 화성신문

고라니와 함께 살아요

 

 

친구들과 올봄에도 냉이와 달래 쑥 엄나무순 등 봄나물을 캐러 갔다. 매연이 적은 화성의 남양 어느 산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 산 속에 너른 평지가 있는데 해마다 온갖 풀들이 새로 돋아난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공기도 좋고 먹을거리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쑥을 뜯고 있는데 뭔가 와다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고라니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놀라 달아날 필요가 없는데 고라니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무서운 동물일 것이다. 인간은 못 먹는 게 없고, 사자 호랑이 맹수들도 동물원에 가둬놓고 구경하는 동물이다.

 

남양에는 노루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노루보다는 고라니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곳 주민들의 밭작물 피해가 크다. 나도 그 마을에서 살고 있는 시인을 아는 덕에 콩과 옥수수 감자고구마를 심어본 적이 있다. 콩을 심고 나서 얼마 후 싹이 났는데 고라니가 그 싹을 다 먹어치워 버렸다. 바닥에서 다시 싹이 올라왔지만 콩꽃도 제대로 못 피고 콩농사는 망했다. 고구마농사 역시 망했다. 마을 주민들은 회의를 했다. 주민들은 총으로 고라니를 잡아버려야 한다고 했고, 시인은 절대로 총으로 고라니를 잡아서는 안 된다 고성이 오갔다고 했다. 

 

그 후 총으로 고라니를 잡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사람과 고라니와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도로가 뚫리고 도시가 생기고 숲과 들판이 사라져 먹이를 잃은 고라니가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다. 작은 생명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 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는 일, 그런 일들이 시인의 역할중 하나일 것이다. 주민들은 밭가에 울타리를 높이 쳐놓고 농사를 짓고 있다.

 

화성시는 궁평 전곡 제부 바다를 끼고 있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무분별한 개발 탓으로 길가나 밭 산자락 어디든 공장이 들어서 있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이다. 서울의 1.4배 넓은 땅을 가진 화성은 앞으로 개발이 계속 될 것이다. 이왕 개발을 한다면 자연을 해치지 않는 친환경적 도시라면 좋겠다. 지친 도시인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 그런 맑은 도시를 기대해본다. 

 

 

 

▲ 정옥선 시인 2014년 <시조시학> 등단, 시조집 『딴죽』 등     © 화성신문

당성의 파도 소리를 찾아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화성은 낙조가 아름다운 서해와 어우러지는 궁평항과 전곡항이 있는 지역이다. 서신면에 위치한 당항성이라고도 불리는 당성 또한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당성을 처음 알게 된 건 최정례 선생님과 문학기행을 갔을 때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당성과 공룡알 화석지를 둘러보며 화성시청에 근무하는 분의 해설을 들었었다. 그 당시 당성을 오르는 길에 여러 종류의 들꽃을 보며 걸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아마도 봄이 완연한 이맘때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맑은 날 당성에 올라서면 서해가 조그맣고 희미하게 보인다. 바닷물이 당성 아래까지 들어왔었다는 말이 실감은 안 나지만 위치상으로 중국과 교류하던 삼국시대의 요충지라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은 복원작업이 한창인 구역을 제외하고 탐방로를 따라 산성을 오를 수 있게 조성해 놨다.

 

당성 정상에는 망해루로 추정되는 초석이 남아 있다. 잠시 벤치에 앉아 그 옛날 당성 아래에서 들리던 바닷물 소리를 찾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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