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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아름다운 문화·문화재를 찾아서⓵
정조의 효 문화 이어받은 양감면 ‘김광서 효자정려문(孝子旌閭門)’
7대에 걸친 효 정신 김철중 어르신께 이어져
완벽 보존 한옥도 자랑거리 우리 문화재 한가득
 
서민규 기자 기사입력 :  2020/09/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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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김씨 공안공파 본 저택 대문의 ‘김광서 효자정려문’ 모습, 대문 위에 현판의 모습으로 돼 있다.   © 화성신문

지난 2017년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알 수 있었던 ‘을묘원행’이 222년 만에 완벽히 재현돼 화재를 모았다. 정조대왕이 서울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 융릉까지의 행차가 완벽하게 재현된 을묘원행은 시민 5만 명이 지켜보며 ‘효(孝)’라는 덕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과 계속되는 당파싸움 속에서도 역사에 손꼽히는 위대한 군주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그의 효심으로 현륭원을 찾는 8일간의 행차는 정조대왕의 효에 대한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국가적 문화재다.  

 

이처럼 정조의 정신이 살아있는 화성에서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효’와 관련된 다양한 전설과 미담이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화성시의 곡창지역으로 유명한 양감면에서도 정조대왕의 ‘효’ 문화는 살아 숨쉬고 있다. 사창2리 안요골길의 경암서당을 지나 200미터를 지나면 수령 375년의 보호수 66호로 지정된 웅장한 느티나무가 당당한 주택이 눈에 띤다. 바로 광산김씨 공안공파의 본 저택이다. 이제는 낡고 낡아 허물어져가는 집의 모양세지만 아직도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인 대문위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바로 김광서 효자정려문(金光瑞 孝子旌閭門)이다. 

▲ 사랑방에서 다양한 한국의 전통 목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철중 어르신.     ©화성신문

효녀문과 열녀문과는 다르게 남성에게 내려지는 효자정려문은 쉽사리 보기 힘들다. 효가 당연시 되는 유교사상의 조선시대에 효자정려문을 내려받았다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효심을 보인 증거다. 

 

효자정려문을 받은 이는 바로 광산김씨 공안공파 13대손인 김광서 선생, 정확한 생년월일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후손들의 얘기에 따르면 정조대왕보다 앞선 영조 쯤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정려문을 만든 해는 고종 7년인 1870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김광서 선생은 어떻게 그 어려운 효자정려문을 나라로부터 받을 수 있었을까? 다행히 김광서 선생의 후손이자 광산김씨 공안공파 20대손인 김철중 어르신(88세)이 생존해 계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김철중 어르신은 “아주 어렸을 적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현판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철중 어르신에 따르면, 효자정려문을 받은 김광서 선생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 누웠다. 병은 지금으로 보면 문둥병(한센병)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둥병에는 인육(人肉)이 최고라는 말에 김광서 선생은 자신의 엉덩이 살을 베어 아버님이 드시도록 했다. 이에 감복한 나라는 김광서 선생에서 효자정려문을 내리고 그 효심을 기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 김철중 어르신 저택에는 다양한 한국의 예술품이 한 가득이다. 모두 우리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김철중 어르신이 직접 구매한 것이다.     ©화성신문

 

김철중씨는 “광산김씨 가문은 높은 벼슬을 계속한 것이 아니라 인품이 좋은 것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면서 “김광서 선생의 예도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효심’이 지극한 김광서 선생의 정신은 기백년을 건너 뛰어 김철중 어르신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으로 전해졌다.

 

광산김씨 공안공파 20대손인 김철중 어르신의 얘기는 김광서 선생의 이야기만큼 애절하고 절실하다. 

 

▲ 김철중 어르신 저택 대문에 ‘입춘대길’ 문구가 새겨져 있다. 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후세에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 화성신문

 

김철중 어르신은 일제치하에 있던 1933년 태어났다. 유복했던 할아버지 덕분에 먹고 살 걱정은 없었지만 그의 인생도 평탄치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늘 바쁘셨다. 그가 태어나기도 한참전인 1920년대에 딸 아이 1명을 낳아놓고 훌쩍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셔서는 또 다시 3명의 딸을 낳은 후 자신을 어머님의 배에 남겨놓고 이번에는 훌쩍 만주로 떠나셨다. 그것이 1932년이었으니 김철중 어르신은 이렇게 유복자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아버님을 뵙지 못했다. 

 

“참, 아버님도 독한 사람이었어, 얼마나 입이 무거우신지 미국에서 있었던 5년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대. 미국에서 돌아와 만주로 떠나면서는 편지도 하지 말고 자신을 찾지 말라고 하셨다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어머님이 홀로 남아 누이들과 나를 힘들게 키우셨지.”

▲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계신 김철중 어르신, 본인 이름 문패 아래에 자식들의 문패를 같이 설치한 것이 이색적이다.   © 화성신문



김철중 어르신이 어머님에게 들은 아버님의 기억은 ‘일본놈들을 참으로 싫어하셨다는 것’과 ‘독립운동가였던 조봉암 선생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 큰 아버님의 말씀으로는 독립자금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하니, 아버님이 미국과 만주로 오가신 것도, 다시는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한 것도 독립운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철중 어르신의 어머님은 고생이 많으셨다. 5명의 자식을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당시로는 보기도 힘들었던 아버님이 일구신 과수원을 운영하시느라 쉬실 틈이 없었다. 

 

“지금 우리집 앞에 있는 논들이 그 때는 다 과수원이었어. 어머님이 참 고생이 많으셨어. 우리 자식들을 다 키우시곤 1980년대 초에 돌아가셨지.” 어머님을 생각하는 김철중 어르신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 김철중 어르신 저택의 다양한 전통 물품들.   © 화성신문



중학교도 가기 힘든 시절, 김철중 어르신은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취업자리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원한다면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철중 어르신이 선택한 길은 고향의 어머니 곁이었다. 

 

농기계도 없이 소에 의지해야 하는 농사일, 일일이 뽑아야 하는 잡초들,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나무들, 어머님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4살 때 돌아온 고향에서 김철중 어르신은 근 50여 년동안 어머님을 모셨다. 

 

“거창하게 효도라고 할 것도 없어, 어머님이 고생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을 뿐이지. 여기서 3남1녀를 키우고 모두 출가시켰으니 억울할 것도 없어.” 김철중 어르신이 웃는다. 

 

▲ 김철중 어르신 저택은 옛 한옥 저택의 모습과 전통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문화재로 손색이 없다.   © 화성신문

 

효자정려문을 받은 김광서 선생의 효의 정신이 7대를 거쳐 김철중 어르신까지 이어졌다면 과장일까?

 

김철중 어르신이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누구보다 우리 문화를 아끼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효자정려문이 있는 광산김씨 공안공파 본 저택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안요골길 11-10 김철중 어르신의 자택은, 고풍스러운 우리 고유의 저택문화가 제대로 보존된 그야말로 문화재로 손색이 없다. 

 

1925년에 지어져 100살을 눈앞에 둔 이 저택에서 태어난 김철중 어르신의 집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 저택보다 오래된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깨끗이 한국 주택의 원형을 보존한 집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철중 어르신은 “이 집은 내가 살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넘겨준 우리의 문화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것”이라며 “이미 자식들에게도 이 집에서 살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했다. 

 

이 집은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의 글귀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만물이 새롭게 시작하고 씨를 뿌리는 봄은 동양 문화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봄에 잘해야 일 년을 잘 보낼 수 있기도 하다. 김철중 어르신은 매년 한지를 이용해 입춘대길 문구를 걸어왔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래를 대비해 붓글씨로 글귀를 새귀어 놓았다. 

 

집 안팎은 모두 소중한 우리 문화로 가득차 있다. 집 앞에 정자를 설치하고, 장명등 등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직접 구매해 놓았다. 집안 내부로 들어가면 우리 고유의 사랑방 등 옛집의 형식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방안 곳곳이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품이 가득한 것은 물론이다.

 

“나는 우리 문화를 아주 좋아해, 서양의 문물은 과학이지 문화가 아니잖아, 소중한 우리 문화를 보전하면서, 서구의 발달된 과학을 받아들였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나처럼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도 많아, 장유유서(長幼有序) 라던지 우리의 정신문화도 계속해서 계승되고 있고 말이야.”

 

우연일까, 김철중 어르신의 외가가 바로 중요민속문화재 123호로 지정된 수원 파장동 ‘수원광주이씨고택’ 월곡댁이다. 전형적인 서울·경기권 한옥주택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외가처럼, 김철중 어르신은 본인의 자택이 화성시 한옥 모습을 간직하며 전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렸을 적 같이 지냈던 수많았던 우리 문중 사람 들도 떠나고 집사람도 3년 전 떠나 이제 나만 남았어. 하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럽고 정갈한 우리 문화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 아니야. 거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일조했으면 좋겠어.” 

 

얼굴을 보면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했던가. 주름이 한가득한 김철중 어르신의 얼굴이 세상 어느 예술품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규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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