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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초대석] 황연하 엘더스㈜ 대표이사
인내·신뢰 무장한 ‘강철 여인’, “역경은 축복이죠”
부업이 ‘사업가의 길’로 인도, 38년 세월 동안 ‘정도경영’ 고수
스물아홉 나이에 ‘사장’ 타이틀, “한 때는 정말 잘 나갔었죠”
“인생은 끝없는 산행, 고의 부도 유혹 뿌리친 건 정말 잘한 일”
“5년 전 LED분야 진출한 후발 주자, 수출 길 멋지게 열 거예요”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0/10/2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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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로고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황연하 대표.  © 화성신문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성공 주기를 방해하는 대신 오히려 가속화할 수 있다. 과거에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람들은 새로운 위협이 닥쳐도 위기감을 덜 느낀다. 리더의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위기 극복에 성공하거나 역경을 무사히 극복했을 때 더 강해질 수 있다.’

 

로자베스 모스 캔터의 저서 자신감에 나오는 말이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들은 오히려 초연해지고 담대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의 끈을 움켜쥔다. 그리고는 결국 강철이라는 두 글자의 훈장을 받는다.

 

황연하 엘더스대표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희망과 인내로 마침내 극복해 냈다.

 

황 대표는 19842월 개인사업자인 대호전자를 설립하며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그리고 2012년에 엘더스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험난한 세월을 지내왔지만 지금까지도 두 개 회사를 굳건하게 경영하고 있다.

 

황 대표가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2년 전인 1982년부터 해 온 부업이 계기가 됐다. 일찍 결혼해 아이가 둘 있었던 황 대표는 직장에 다니던 남편 봉급으로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에게 부탁하니 삼성전자 1차 벤더가 연결됐다. 그 회사의 부품을 떼다가 주부들의 노동력을 활용해 조립한 후 납품하는 방식이었다. 취급 품목은 삼성전자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안테나였다.

 

 

▲ 황연하 대표가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화성신문


  

부업으로 번 돈이 남편 봉급 10

 

수원시 인계동에 있던 집을 작업장으로 썼다. 1차 벤더에서 황 대표의 집에 물건을 산더미처럼 갖다 놓으면, 황 대표는 아는 주부들에게 전화를 하고, 그 주부들은 부업에 관심 있는 동네 여인들과 함께 황 대표의 집에 들러 안테나 부속품들을 이고 지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서 작업한 후 다시 황 대표의 집으로 가져오는 시스템이었다. 황 대표는 작업장으로 개조한 집에서 2년 동안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과 함께 주부들이 자르고 조이고 감아서 가져온 부품을 납땜하고 조립하고 포장해서 1차 벤더에 납품했다. 직원 두 명이 퇴근하면 혼자서 새벽 두세 시까지 작업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는 정식 사원 일당이 3,000원하던 시절이었어요. 8시간 근무 기준으로요. 아르바이트 하던 주부들은 한 개 하는데 얼마 하는 식이었어요. 많이 하는 사람은 하루에 6,000원도 벌었어요. 직장생활보다 훨씬 나았죠. 적게 하는 사람은 1,000원도 벌었어요. 40명 정도가 일했어요.”

 

부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직원 두 명의 봉급을 주고도 남편 봉급의 10배 정도가 됐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업자 등록을 냈다. 19842월이었다. 27세에 시작한 부업이 2년 후 공식 사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정식 사장이 된 황 대표는 제조장이 필요해지자 수원 우만동에 공간을 임대했다. 사업자등록증이 나오면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가 나이는 어렸어도 배짱이 있었어요. 우만동에 임대한 40평 공간에 라인을 깔았어요. 3개월 기간 동안 단독주택이던 우리 인계동 집의 일부를 부셔서 거기에 공장을 지었어요. 대지가 73평이었는데 바닥 면적 60평의 공장을 지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3개월 후에 이전했죠. 주문이 밀려들었어요. 인원이 없어서 생산을 못할 정도였어요. 60평 공간에서 60명이 작업했어요. 콩나물시루였죠. 그 공간에서 작업하면서 동시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공장을 지었어요.”

 

사세가 커지면서 1989년도에는 충남 성환에 제2공장을 임대했다. 250평 규모의 2층 짜리 건물이었다. 현대전자 1차 벤더가 됐고, 컴퓨터 모니터를 조립했다. 삼화에서 ODM(제조업자 개발 생산) 방식으로 생산하던 LG 파워 서플라이도 취급했다. 그렇게 수원과 성환을 오가며 2년 동안 일하니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성시 병점에 3층 규모의 공장을 짓고 1991년도 1월에 성환에서 이전했다. 현대전자 물량을 병점에서 작업해서 이천으로 납품했다. 수원 인계동 작업 물량은 계속 축소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정식 직원 수가 200명이 넘었어요. 꽤 많았죠. 1층에서는 오토 인서트라고 해서 자동으로 부품을 삽입해 주는 기계들이 작업을 하고, 2층에서는 조립을 했죠. 3층은 사무실과 회의실, 식당이 있었어요. 2교대로 돌아가며 24시간 풀가동했어요. 그렇게 잘 나가다 1997년도에 IMF를 만났죠.”

 

어렵게 IMF 상황을 극복하나 싶었는데 본격적인 시련은 2000년도부터 시작됐다.

 

“2000816일에 현대전자에서 이미지캐스트라는 회사가 분리됐어요. 현대전자가 수출이 많았잖아요. 이미지캐스트로 분사되면서부터 해외 주문들이 계속 취소되는 거예요. 저는 생산 계획을 다 잡아놓잖아요. 인원은 200명이 넘고. 물량을 생산하려고 하면 오더가 캔슬되고, 또 다른 물량을 생산하려고 하면 또 캔슬되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는 거죠. 그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죠.”

 

 

▲ 쇼룸에서 사진촬영하고 있는 황 대표.  © 화성신문


  

신뢰 얻으니 어려울 때 천사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그해 11월에 공장을 27억 원에 내놓았다. 세 개 회사와 가격 협상이 진행되던 12월 말경에 동탄신도시 274만 평 조성 계획이 발표됐다. 황 대표의 공장 부지가 신도시 조성 계획안에 들어갔다. 수용되게 된 것이다.

 

저희 회사 땅이 팔릴 일이 없잖아요. 수용되니까. 그래서 못 팔고 3년이 지나간 거예요. 주문이 없는 상태로 3년이 지나니까 바닥을 치더라고요. 벌어놓은 돈 다 까먹고 빚만 남은 거예요. 200010월 봉급이 11월에 지급됐어요. 제가 1984년부터 200010월까지 단 한 번도 봉급 날짜를 밀려본 적이 없어요. 항시 전일에 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처음으로 11월 봉급을 12월에 못 준 거예요. 직원들이 자동적으로 퇴사를 하더군요. 그 많은 인원이 한 명씩 노동부로 가서 신고를 했나 봐요. 어느 날 노동부에서 근로감독관이 찾아온 거예요. 제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묻더군요. 왜 이러고 있느냐고요.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대표자가 다 도망간다고. 대표자가 이렇게 회사를 지키고 있는 건 처음 본다고 하더군요. 제가 대답했죠. 밀린 급여는 못 주더라도 내가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문 닫을 마음은 전혀 없었거든요. 조금씩이라도 일을 해야 회생할 수 있는 기회도 열릴 수 있으니까요.”

 

그 무렵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대표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재산을 지키려면, 아들에게 넘겨주고 고의 부도를 내라는 조언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의 부도가 많은 시절이었다. 황 대표는 마음이 흔들리고 갈등했지만, 결국 정도 경영을 택했다. 고의 부도를 내면 자식들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토지개발공사(현재의 LH)에서 보상이 나온 건 200310월이었다. 꼬박 3년을 버틴 것이다. 3년 동안 매달 고정비로 4,000만 원이 나갔다. 퇴사하지 않은 일부 직원이 남아서 일을 했고, 세금과 전기세를 포함한 금액이다.

 

공시지가에 훨씬 못 미치는 보상을 받았어요. 보상 받은 돈으로는 은행 빚도 다 못 갚더라고요. 기업은행에 6억 원의 빚이 남았고, 퇴직금은 퇴직금대로 남았어요. 정말 갈 데가 없더군요. 임대를 얻을 돈도 없고. 그때 천사가 나타났어요. 호호.”

 

고의 부도를 제안했던 그 대표가 자신의 건물 중 150평을 무상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도 경영을 지키려고 하는 황 대표의 사람 됨됨이에 믿음이 간 것이었다. 그렇게 화성시 능동에서 열심히 일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2년 후 인근 반월동에 공장을 임대했다. 직원 수도 50명으로 늘었다.

 

반월동에서 속옷 하나 안 사 입고 5년을 견뎠어요. 그렇게 악착 같이 돈 벌어서 모든 빚을 갚았어요. 은행 빚도 갚고, 예전 직원들 밀린 퇴직금도 다 갚았어요. 빚이 1원도 없었어요. 정말 날아갈 듯이 가뿐했어요. 그런데 공장 주인이 이사를 가라고 하더군요. 바닥 공사에 수억을 들였는데 안타깝더군요. 그래서 또 내 공장이 필요한 때가 됐나보다 생각하고 지금의 정남면 신리 땅을 사서 공장을 지었어요. 건물도 회사 용도에 맞도록 제가 지었어요. H빔 사고 판넬 사고 작업 인부를 구해서 일을 시켰어요. 2011년 봄에 이전했어요. 정남면 시대가 열린 거지요.”

 

정남면 시대를 열면서 황 대표는 기존 개인회사와 별도로 법인 엘더스를 설립했다. 매출이 쑥쑥 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차례 고난이 찾아왔다.

 

삼성이 해외로 다 빠지더군요. 물량이 확 줄었어요. 그때 나의 브랜드로 자생력을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래전에도 내 브랜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절실하지 않았던 거죠. 고민 끝에 결정한 품목이 LED 조명이에요. 지금도 삼성 SDS, 삼성 생활가전, 메디슨 의료기기 등 다양한 제품들을 취급하고 있지만, 자체 브랜드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어요.”

 

 

▲ 엘더스가 생산하는 LED 조명.  © 화성신문

 

▲ 엣지 타입의 평 판넬 LED 조명이 설치된 실내 공간.  © 화성신문

 

 

인내와 의지로 우뚝 일어선 오뚝이 CEO’

 

2016년도에 개발을 시작해 지금까지 KS 인증을 받고 조달청에 등록한 아이템이 엣지 평판 조명, 가정용 조명, 산업용 조명 등 10개에 달한다. 조만간 골프장 나이트 경기에 사용되는 고효율 스포츠 조명도 조달청에 등록할 계획이다.

 

제품 품질에는 자신 있어요. 올 국산 제품이에요. PCB까지도 전부 국산입니다. 또 방열에 강점이 있어요. 방열을 위해서 알루미늄을 씁니다. 열을 제대로 빼내지 못하면 제품 품질에 이상이 생길 수 있거든요. 제품에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엘더스는 LED분야에서는 신생 후발 주자예요. 영업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어요. 수출 길도 멋지게 열어 볼 생각입니다.”

 

황 대표는 지난 세월 병치레를 많이 했다. 암으로 3개월 선고도 받았었다. 병원 치료 때 노출되는 방사선 수치보다 2000배 높은 까지 먹었다. 선풍기 아줌마처럼 얼굴을 몰라볼 정도였던 적도 있었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며 힘겨운 세월을 보냈지만, 지금은 오뚝이처럼 우뚝 서 있다.

 

황 대표는 지금 화성시여성기업인협의회 회장이기도 하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의지와 인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황연하 대표가 집무실에서 엘더스 LED 제품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화성신문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잖아요. 저는 제 삶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삶의 스위치를 행복 모드, 긍정 모드로 맞춰 놓았거든요. 저는 어디를 가도 떳떳해요. 고의 부도 유혹을 뿌리치고 돈하고 바꿀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거든요. 부업한 것부터 시작하면 38년의 세월이에요. 인생은 끝없는 산행이에요. 항시 오르락내리락 하네요. 역경은 축복입니다. 제자리에 서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제가 1955년생이에요. 이 나이에도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4학기 째예요. 내년 2월에 졸업한답니다.”

 

30~40대에는 스킨스쿠버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유화 그리기를 취미로 삼고 있다는 황 대표의 리더십이 궁금했다.

 

“38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전략이 필요한 것 같아요. 미래를 생각하는 거예요. 큰 그림을 그리는 거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는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포기할 때는 빨리 포기할 줄 아는 게 중요해요. 전략적 리더십이죠. 호호.”

 

이런 황 대표에게 어떤 별명이 어울릴까. ‘강철 여인은 어떨까.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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