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 칼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장례문화 칼럼 ➊] 설·추석 명절 차례에 대한 유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1/09/06 [09:53]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최 혁 하늘가장례식장 대표

인류가 생존을 하면서 가장 오래된 의식은 아마도 장례와 제례의식일 것이다. 삼십만 년 전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이 장례의식을 치렀다는 학계의 연구결과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의식을 치르면서 살아가지만 가장 보편적인 제례의식은 아마도 기제사와 설·추석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아닐까 싶다.

 

차례 문화는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이름만 다를 뿐 대부분 행해지던 고유의 의식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대부분 이른 봄에 행해지던 의식은 조상신에게 한 해 농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풍년이 들기를 또한 사고 없이 무탈하기를 비는 의식으로 진행 되었다.

 

가을에 행해지던 의식은 첫 수확물을 거두어들이고 조상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나라의 설 차례와 추석 차례에 있어서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설 차례는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이기에 설날부터 시작하여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던 농경사회의 큰 축제이자 준비 기간이었고, 추석 차례는 첫 수확물을 통해 조상신에게 감사를 드리던 소박한 제례의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차례 상은 간소했다. 그 지방의 첫 수확한 농산물 몇 가지를 올리는 것으로 예를 표했는데, 언젠가부터 차례 상이 기제사에 버금가는 성대한 상차림으로 변하고 고부간에 갈등의 요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에서도 이러한 허례허식을 축소하고자 차례의 의미를 부각하고, 현존하는 종가집의 간소한 차례 상을 뉴스를 통해 송출하면서 간소한 상차림으로 마음을 표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차례 상이 요즘처럼 성대하게 되었을까? 그건 1960~70년대 고도 산업화와 성장기를 지내면서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불과 40~50년 전 이야기지만 그 시절 농촌, 산촌, 어촌의 젊은이들은 모두가 도시로 이주하여 산업현장에서 근로를 제공하게 되었고, 주말도 없이 야근, 특근, 휴일 연장근무를 하다 보니 고향에 다녀올 수 있는 시기는 딱 명절 두 번뿐이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일 년에 단 두 번 고향에 가다보니 미안한 마음과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듯하여 최대한 많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버스와 기차에 올라타 고향을 향한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부모형제 뿐만이 아닌, 죽은 조상에 대한 예의 또한 마찬가지로 표현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뉴스에 나오는 중국의 농민공들이 청명절과 노동절에 고향에 가는 뉴스 화면을 보게 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 불과 40~50년 전 우리의 모습 또한 현재 중국 농민공의 모습과 똑 같았으니 말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명절 차례는 농경사회의 의식이므로 지내지 않더라도 무방하지만 우리의 오래된 전통이고 관습이기에 본래의 취지에 따라 조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뜻으로 간소히 지내고 가족 간에 우의를 돈독히 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보내기를 바래본다.

 

 


 

최 혁 하늘가장례식장 대표는?

봉안당·장례식장을 운영하며 경기도 ‘장사재단법인 관리지침’ 수립, 공정위 ‘소비자분쟁해결기준’ 수립을 위한 자문활동 등 올바른 장례문화를 선도하는데 앞장서 왔다. 또 화성시 사회복지협의회·자원봉사센터 이사, 화성시 사회공협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장례 후 남겨진 유가족 돌봄 프로그램을 복지단체와 연계해 시행하는 등 복지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