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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시인의 마음을 읽어주는 시인]
묵집에서 장석남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5/2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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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화성문인협회 사무국장     ©화성신문

     

 

 

 

 

 

 

 

 

 

 

 

묵집에서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 장석남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2010 창비

 

 


 

이 시를 읽으면 자꾸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감정의 질감이 말랑하게 만져진다. 미끄러지는 생각의 무늬가 반듯한 사각이라니. 나직한 수평이 삐딱해진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서로의 간격에서 집요함이 꿈틀거린다. 미끄러지듯 도망치고 있지만 사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미끄러지는 것도 고백이었을까

누구나 잡히고 싶어 안달이 나서 자꾸 도망치려 했던 적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미끄러지려고 작정하는 마음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무엇을 놓아버리는 일은 다음에 올 무엇에 대한 가장 큰 확신처럼 말이다 

누군가 오래 그윽이 바라보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은 대부분 바닥에 바짝 몸을 밀착시킨다. 늘 안전한 도피는 손 뻗으면 잡히는 곳에 있다. 더더구나 으깨지고 뭉개질 각오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한때 우리들의 사랑도 이러했으리라

망가질수록 정직해지는 사랑, 떫고 쓸쓸한 뒷맛이 더 땡기는 사랑,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사랑이 한 번쯤 있었다면 묵집에 가서 호젓함을 맛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살면서 미끄러져 보는 일,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면 가지런한 사각의 마음을 한번 잡아 보시라는 당당함으로 미끄러지기 좋게 한 번쯤 슬쩍, 내 몸을 동그랗게 말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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