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화성지부 지부장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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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폭설에 부러진 영산홍 가지를 다듬어주다 말고,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져 8년 전 그때처럼 전철을 탔다.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전철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어 송곳처럼 꽂혀 있어야 했다. 8년 전 그때처럼 목 디스크가 터졌는지 등 쪽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이 아니라 뼈만으로 앞을 향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옳은 신념이든 그른 신념이든 그 신념의 뼈를 뿔처럼 앞세워 앞으로만 전진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광장에서는 찬성파의 분신 사건이 있었고 고층아파트에서는 반대파의 투신 사건이 있었다. 뼈처럼 단단한 스크럼이 뼈처럼 단단한 스크럼을 부르던 때였다. 엄숙함과 비장함이 일사불란하게 펼쳐졌다. 그때의 기억이 마음을 조금 더 무겁게 했다.
8년 전의 촛불이 생각났다. LED 촛불이 아니라 종이컵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던 양초의 촛불이었다. 그 소란에도 유모차 속 아기는 평화로이 잠들어 있었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부부가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촛불에 녹아떨어진 촛농이 단단한 꽃받침같다고 느껴졌다는 생각이 났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자 막 시작된 석양빛이 뒤통수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억세고 거칠고 투박한 어둠이라도 빛 한 조각에 무너지는 법인데, 인간의 어둠은 왜 반복되는지, 역사의 어둠은 왜 다시 돌아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물놀이패들을 둘러싼 젊은이들의 표정은 밝았고 그들의 손에 들린 응원봉들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촛농이 떨어지고 불빛이 흔들리는 양초도 아니고, 꺼지지 않는 LED 촛불도 아니고, 아이돌 응원봉이라니! 처음에는 내가 잘못 왔나 싶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K팝 음악 소리, 함성 소리, 민중가요 소리, 함성 소리, 농악 소리, 다시 함성 소리. 마음 깊숙한 곳에는 저마다 비장과 엄숙과 각오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나, 그 어두운 무거움을 밝은 가벼움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원통하지만 차라리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고 싶어졌다. 파시스트를 찬양하기 위한 군악대의 소리를 왈츠로 전환해 내어 군중들은 물론 단단하게 행진하고 있던 군인들마저 춤을 추게 하였던 양철북 소리가 생각났고 나도 춤을 추고 싶어졌다.
세대 간의 불통 같은 건 없었다. 계층 간의 갈등도 없었다. 젠더 갈등이나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그 잘난 벽 같은 것도 없었다. 민노총과 ‘민묘총(전국 민주 고양이 총 연맹)’의 깃발이 함께 오르고, ‘강아지 발 냄새 연구회’ 같은 깃발이 하늘에 펄럭였을 때 권위주의 따위는 땅바닥에 떨어지기에 충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을 보유한 국민답게 우리는 문학적이기까지 했다. 모두가 ‘우리’라는 거대한 흐름에 몸과 마음을 뭉치고 있었다.
우리는 ‘처단’이라는 용어가 ‘도살’처럼 들리는 치욕을 겪고 있지만, 나는 어떤 재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저력을 다시 믿고 싶어졌다. 해산 후에 젊은 두 남녀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주워 온 쓰레기를 얼른 받아 봉투에 넣어주었다. 마음이 가벼워져 돌아오는 내내 등이 아픈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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