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기획특집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아픔과 상처투성인 매향리를 찾아서
매향리에 봄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1>
 
/정리=강민수 기사입력 :  2006/05/22 [00:0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매화꽃이 가득하다 해 이름 붙여진 마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이름만 들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리라 여겨질 법도 한 이곳이 왜 우리 기억에는 고통과 상처가 연상되는 곳. 이곳이 지난해 8월 완전 폐쇄되면서 평화마을과 해양체험 관광지로 개발이 예정돼 있다. 그저 묻어버리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컸던 매향리를 찾아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매향리에 찾아올 봄을 기대하며 3편에 걸쳐 그 사연을 소개한다.<편집자주>

매향리!
서해안 고속도로 발안인터체인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조암방향(82번 지방도)이 나오는데, 조암에서 매향리로 가려면 303번 도로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까지도 매향리 입구 야트막한 언덕 우측에는 매향리 미공군국제폭격장 주민대책위원회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는데, 대책위 사무실 벽면에 그려진 그림만이 웅변하듯 시선을 끌고 있으며, 마당의 포탄들은 이곳이 매향리임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널리듯 쌓여있다.

대책위 사무실 서편으로는 바람도 베일 것 같은 폭격장 철조망과 황색깃발 그리고 농경지가 이어져 있고 육지가 끝나는 지점에 지금은 폐쇄된 기총사격장터가 있다. 바다 저편에는 매향리 만큼이나 많이 알려진 예전 푸르기만 했던 농섬이 자리하고 있고 멀리 입파도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화성의 서편 남쪽 끝으로 손톱만큼 자연해안이 남아있는 곳, 너른 들판과 푸른 몸짓으로 자리잡은 숲, 그 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갯벌과 그림처럼 솟아 있는 섬과 섬들, 폭격이 없는 주말에 매향리를 접한다면 화성의 자연해안과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평화로운 어촌마을이다.

그러나 매향리를 생각하면 아름다움이 아닌 상처와 고통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세기를 넘긴 냉전의 냉혹함과 야만성이 고스란히 흐르고 있는 곳, 그 실상과 이름에 최근에야 세상에 알려진 곳,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그 어디에도 풀어놓지 못하고 포탄의 폭발음처럼 매일 매일 쌓여만 가던 곳, 다름 아닌 미군의 폭격장이 있기 때문이다.

야만과 파괴의 이름 '쿠니' 매향리 미공군국제폭격장은 '쿠니사격장'으로도 부르는데 행정구역상 매향 1리인 ‘고온리(일명 고온포)’를 미국식으로 부르면서 생긴 이름이다.

매향리에 폭격 및 사격장이 조성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미군 폭격기들이 지역주민들과는 아무런 상의나 통보 없이 마을의 해안으로부터 약 500미터쯤 떨어진 구비섬을 표적 삼아 폭격연습비행을 시작함으로써 생겨나게 됐다.

이후 계속되는 폭격훈련으로 구비섬이 완전히 날라가 평지화되면서 유실되자 해안으로부터 약 1200미터쯤 멀리 떨어진 농섬으로 그 표적을 이동시킴과 동시에 인근의 땅(사유지) 약 40만평을 국방부에서 강제 수용하여 1968년 미군에게 무상으로 공급하기까지 했다.

이곳 매향리 사격장은 해상과 육상 사격장이 서로 연접해 있어 해상 및 육상 목표물에 대한 동시전시형 사격 훈련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민원을 무시한 채 사격장으로 유지돼 왔다.

무엇보다도 기체 결함으로 인한 경우와 엔진고장 등의 시뮬레이션 상황에 따라 수천피트 상공에서 비상착륙시도훈련이 가능한 오산비행장(실제 행정구역은 평택시임)이 폭격장 부근에 있고, 인근에 민가 등의 실질적인 폭격 장애물이 있어 실전과 같은 생생한 훈련이 가능해 동북아지역에서는 가장 우수한 미군 전용의 폭격 연습장으로서 활용돼 왔다.

이로 인해 오산과 군산 대구비행장에 있는 한국 또는 미군 폭격기는 물론 일본, 태국, 괌, 오키나와 및 멀리는 하와이에서뿐 아니라 항공모함 주둔 미군기 등이 매향리까지 이동해 폭격 연습을 해 왔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되는 폭격은 경우에 따라서는 깊은 밤까지 이어지기 일수였다. 사격장과 폭격장이 주택가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관계로 폭격으로 인한 소음과 진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실제로 지역 주민들에게는 재산상의 피해는 물론 생명마저 위협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안겨왔다.

그간 매향리 주민들이 겪은 시름 깊은 사연은 매향리 전만규 위원장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 우리 매향리 주민들이 미군으로부터 인간 차별 속에 살상 실험용으로 활용돼야 합니까? 왜 우리 매향리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생존권을 위협받고 고통을 외면당해야 합니까? 왜 우리 매향리 촌놈들이 어울리지도 않는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미군과 정부를 상대로 생존권 투쟁을 해야만 합니까? 왜 우리 매향리주민들이 폭격 중에 표적지로 달려들어 목숨을 건 시위농성을 해야만 하고, 아까운 시간과 돈을 들여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해야합니까? 왜 촌놈 전만규가 가정을 팽개치고 반미투사가 되어야 합니까?”

 -2000년 전만규위원장의 법정 진술문 중에서-

주민들은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허공을 향해 공허한 외침을 시작했다.

<기사제공=화성의제21>

<다음호에 계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