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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탐방] 의병장'한명윤'
나라지킨 영웅의 발자취를 찾아서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06/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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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에서 82번 도로를 타고 오산 방향으로 가다가 양감면 사창초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달리다 보면 정문리에 닿게 된다. 마을 앞쪽의 거목 한 그루와 아담한 정자와 홍살문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다. 홍살문 뒤로 '忠烈門(충렬문)'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나타난다. 대관절 한명윤이라는 인물이 누구이길래 마을입구에 눈에 띄게 유적지를 꾸며 놓았을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 한명윤 밀양박씨 열녀문
한명윤은 최근 있었던 전투에 대한 공을 포상하는 과정에서 공평하지 못한 처사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열악한 상황에서 왜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포상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면서, 상소와 함꼐 참모·장사·군량을 부조한 사람의 명단과 무술연마책을 바치니 올바로 처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어서 12월 9일에는 보은에서 상주, 선산, 보은, 회덕, 진잠, 영동, 황간 등 지역의 의병장들이 모여 돌아오는 2월 25일 호남의 의병장 김면과 합세하여 왜적을 치자고 계획하였는데, 이 계획을 주도한 것도 한명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명윤은 다음해인 1593년 4월 9일 정 3품의 관직인 상주목사에 제수된다.

이어서 6월 6일 각 진에서 올라 온 승첩 및 노획 보고에 의하면 한명윤 등이 적암 등지에 진영을 설치하고 의승법정 등과 합세하여 44과의 수급을 참획하였다고 되어 있어 이때까지도 한명윤의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주한씨양절공파족보'에 의하면 1593년 6월 11일에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전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조실록'에 의하면 특진관 윤선각이 영동을 사수하고 야습을 감행하여 적을 물리친 한명윤의 공을 이야기할 때, 검토관 정경세가 한명윤이 항복한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데서 그의 죽음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어쨋든 한명윤은 전란 중에 사망하여, 바로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1년이 훨씬 지나서야 장례를 치룬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595년 1월 충청도 각 군현의 수령들이 회문을 돌리고, 한명윤이 나라를 위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가난하고 자식도 힘이 없어 일년이 넘도록 청주에 관을 두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면서, 수령들이 각각 미포를 부조하여 객지에 있는 관을 고향으로 가져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공주목사를 비롯한 충청도 수령 16인이 각각 쌀과 포목을 수렴하고 청주목사가 유사가 되어 상가에 전달하여 장례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한명윤은 의병장으로서의 공을 인정받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를 받기에 이른다.

화성과 한명윤의 관계

이제 다시 정문리 마을 입구의 한명윤 유적지로 되돌아가 보자.

정문리 마을 주민들이 이토록 한명윤과 밀약 박씨의 정문에 정성을 쏟고 있는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정문리가 바로 청주 한씨 양절공파 후손들의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민들은 한명윤을 이 마을의 입향조로 알고 있었다. 즉 한명윤의 첫 배위인 나주 박씨의 친정이 이 부근이었고 그래서 한명윤이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명윤이 이 마을의 입향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명윤과 그의 아들 한각, 그리고 그의 선대의 묘는 용인 선산에 있는 반면 한각의 배위인양성 이씨와 장자 인한상검 이하 후손들의 묘는 정문리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한각이나 한상검 이후부터는 정문리에 정착하여 살아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한명윤의 차남 한진과 그 후손들의 묘는 송탄면 칠음리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형제가 각각 정문리와 칠음리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한명윤의 장자와 그 후손이 정문리에 정착하게 되면서 화성과 한명윤이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그의 충신정문이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언제, 어떠한 연유로 오류가 생기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한명윤 유적지에 세워진 비석을 비롯하여, 각종 책자, 웹페이지, 그리고 도로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표지판에 이르기까지 열녀 정문의 주인공을 박행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밀양 박씨의 오류로 최근 이 오류를 정정하자는 의견이 종종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선은 행정기관이 나서서 도로의 문화재 안내표지판과 유적지 앞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 설명운, 기관 홈페이지의 설명문 그리고 앞으로 제작되는 관광안내 지도와 책자 등의 오류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임진왜란이나 의병활동에 관한 전문 연구자들이 충청지역의 다른 의병활동과의 연관성 등을 연구하여 의병장 한명윤에 대한 보다 풍부한 연구성과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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