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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병마골 이야기 2
이길원 화성시문화관광해설사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3/07/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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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의 퇴각
원수곡에서 상기2리 쪽으로 1km쯤 가면 정보통신 공장 옆에 건달산을 넘어 세곡리로 가는 산길이 있다. 이 길은 천년 이상 내려온 길로써 건달산 동서 마을들이 서로 통행하던 큰 길이었다. 권율의 군대는 건달산 중허리를 넘어 세곡리로 넘어갔다.
권율의 군대가 미동도 안하자 수상히 여긴 일본군은 왕림고개를 넘어 원수골에 진입했다.
아무도 없는 빈 골짜기임을 확인하고 이웃 점공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고서야 세곡리 고개골로 퇴각했음을 알게 됐다.
 
일본군의 추격
일본군은 산길을 추격하지 않고(산길은 매복의 위험이 있으므로) 왕림으로 회군해서 세곡리 입구를 차단했다. 그러나 권율의 군대는 이미 세곡리를 지나 덕리를 향했으므로 일본군의 전 병력은 덕리로 진입했다. 덕리는 골이 깊어 뒤 끝까지 들어가 수색하려면 몇 km는 되었고, 서봉산 밑에까지 가서 권율의 군대를 찾았으나 갈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회군하여 덕리를 빠져나왔다. 덕리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대 수만 명이 덕리에 와서 마을을 끝까지 뒤졌는데, 왜 그들이 왔는지 알 수 없다는 진술이었다.
나도 그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였으나 몇 개월 고민한 끝에 그 진술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곡리를 빠져 나와 큰길을 가던 권율의 군대는 다급한 김에 덕리로 들어간 것이고, 일본군이 쫓아오는 동안 덕리에서 백리로 가는 옆구리 길로 빠져 나간 것이었다.
일본군이 헛일을 하고 다시 왕림으로 회군하면서 주민에게 물으니 ‘백리는 갔다’는 답을 얻었다. 십리, 이십리, 백리면 안성까지는 갔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일본군은 건너편 야산 언덕에 말 무덤을 만들었다.
 
말무덤 -마하리
작전한 지역이 산악이고 좁은 길이었던지라 상한 말이 많았고 죽은 말도 많았으므로 말을 묻어 주었는데 그 후에 마을 이름을 ‘말무덤’이라 하다가 다시 ‘마하리’라 부르게 되었다.
말무덤을 만든 일본군은 노루고개를 넘어 분천, 수기로 해서 수원고읍(융건릉 자리)을 향하게 되었다. 수원고읍에 관아, 향교 등 큰 건물이 있었고 인근에 신라고찰 갈양사가 있었으므로 숙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기를 간 듯하다.
갈양사를 불태우다
수원고읍에 숙영한 일본군은 갖은 행패를 자행했다. 2~3일 쉬고 있을 때 권율의 군대가 며칠 전에 정남 냇갈을 건너 독산성에 입성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이제 됐다, 독안에 든 쥐다’라는 확신을 한 일본군대는 숙영지를 떠나면서 천년고찰 갈양사를 불태운다.
이때 신라 범종 종루도 불타고 신라 범종은 잿더미에 묻힌다. 200년이 지난 후 정조임금이 용주사를 세우면서 범종을 찾아 다시 걸었으니, 오늘날 전해지는 용주 범종이 바로 이 갈양사 종이다.
 
일본군의 독산성 포위
보통리로 해서 정남 냇갈을 건넌 일본군은 정남천 건너 들판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지금 세마대에 가보면 절 뒤에 옹달샘이 있고 관광객이 먹을 정도의 물은 충분하지만 5,000명의 군사가 쓰고 먹을 물은 충분한 곳이 아니다. 평야지대를 거쳐 왔으므로 식량은 충분하겠지만 높은 봉우리에 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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