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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병마골 이야기-마지막회
이길원 화성시문화관광해설사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3/07/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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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의 세마-일본군 퇴각
그 생각을 읽은 권율은 세마를 시킨다. 지금 세마정을 가보면 그 자리가 세마했던 장소일 것이고 그 정자의 향배로 볼 때 일본군의 진지가 빤히 보이는 정남들일 것 이라는 판단이 선다. 세마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일본군은 결정했다. ‘물도 많구나, 기다려봐야 석달열흘은 버틸 것이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군대가 아니지, 한양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한양으로 가자!’ 그렇게 일본군은 철군을 결정하고 보통리, 분천, 내리길을 따라 군포, 의왕, 과천, 남태령으로 철군했다.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일본군이 떠난 후 권율의 군대도 독산성을 내려왔다. 하지만 일본군이 간 길을 따라 갈 수는 없는 것, 병점 떡전거리로 나왔다. 떡을 본 병사들은 눈빛이 변했고 안색이 변했다. 도망가야 하는 군대가 편하게 떡 먹을 시간이 없었을 터이나 권율은 덕장이었다.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시루떡, 콩떡, 인절미, 백설기 닥치는 대로 사서 등짐에 실었다. 그리고는 반정리 길로 들어서 권선동 우만동길로 지지대 고개에 당도했다. 거기서 숨 돌리고 떡을 배불리 먹이고 시흥대로를 치달려서 한강을 건너고 행주산성에 입성했다. 지지대나 시흥대로는 정조임금이 후세에 내려온 길로 유명하지만 그 때도 길은 있었고 200년 전 권율이 행주산성을 향해 달려간 길임이 분명하다.
 
행주치마
행주산성에 권율이 입성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총사령관 소서행장의 지휘 아래 10만 병력을 총집결해 행주산성을 포위했다. 행주산성을 가보니까 지형지세가 독산성과 비슷했다. 천혜의 절벽이었으므로 행주치마에 주워온 돌로 석전이 가능했던 곳이고 낮에 아무리 공격해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으므로 성을 포위한 채 밤을 쉬게 되었다.
지금 행주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서북쪽에 넓은 들이 보인다. 그때는 이 들이 갯벌이었다.
일본에는 갯벌이 없고 바다면 바다지 밀물, 썰물이라는 개념이 없다. 일본군이 낮에 보니 바다니까 바다는 그대로 두고 육지만 포위했다.
 
임금을 만나다
그러나 서해안의 10m이상 간만의 차는 밤중에 그 넓은 바다가 갯벌이 되었다. 권율의 군대는 조용히 내려와서 그 갯벌을 통과해 밤새도록 해주로 달려갔다(고양시 해설사들의 해설).일본군을 따돌리고 해주를 거쳐 평양에 가서 선조 임금을 알현했다.
마무리
이상의 이야기를 쓰는 데는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서 전국의 해설사들과 대화하면서 들은 얘기가 많이 참고 되었다. 
삼천병마골 이야기는 인근마을마다 전설이 많지만 정리되지 못했으므로 필자가 이 고장 사람으로서 정리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삼천병마골이나 권율의 행로를 알고 있었는 듯하다.
가령 구한말에 한국 군대의 신식교련을 위해서 일본군의 굴본예조 중위와 100명의 병사를 유치한 적이 있는데, 굴본 중위가 고론리 포구에 내려서 조암, 발안, 구장리, 기천리, 상기리를 거쳐서 삼천병마골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는 내리, 군포, 의왕, 남태령으로 갔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일본인들이 너무 계획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본 육군사에 삼천병마골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만 모르고 헷갈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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