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우리의 대통령 과연 누가 잘했나
전)화성시의회 의원 박길양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5/04/01 [16:14]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모정당의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나치전범인냥 히틀러 묘역에나 가서 참배를 하라는 식의 말을하기에 역대 대통령의 레임덕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초대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건국대통령이다. 투철한 국가관과 자주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소련의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반공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에 공산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조선로동당 김일성위원장의 민주질서를 전복하려는 선전과 투쟁수단을 저지하고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심어주는 민주주의 국가관을 확립해 민주국가 건국에 사명을 완수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기도 했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와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후  1952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1960년 4대 연임됐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비민주적인 지도자로고 비난받기도 했다.

 

정부수립과 관련해 제주4.3무장폭동과 여수반란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세력의 총공세와 남한의 5.10총선 교란을 막아내며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토지개혁등의 효과적인 반공정책을 수행했다. 6.25전쟁 중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고 안보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고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집단과 남로당의 세력에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과 3.15부정선거에 의해 4.19학생혁명과 부정선거의 규탄으로 정권은 타도되었고 이승만대통령도 사임, 미국하와이로 망명해 자유당 정권은 붕괴하게 되었다.

 

이어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정권이 붕괴됨에 민주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60년 8월13일부터 62년 3월23일까지 재임했다. 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로 62년에 쫓기듯이 사임을 하고 민정당을 창당해 출마했지만 박정희에게 낙마했다. 이후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했지만 국민소득은 60달러 수준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포항제철를 비롯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근대화를 이룩했다. 박정희대통령은 63년과 67년에 이어 7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보릿고개를 타파하고 민주화가 절대빈곤에 우선할 수 없다는 논리로 독재와 장기집권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산업화에 초석을 다졌다. 

 

한편 월남파병과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차관과 외화를 확보하였고 우리광부들이 일하던 함보른 광산을 방문하여 광부와 간호사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 후 국가발전을 위해는 장기집권이 필요다고 판단하였으나 당시 헌법에는 3선까지로 제한하고 있어 75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집권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자 유신헌법의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개헌에 성공하고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고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추풍령식 조림이라 하여 나무를 식재할 줄만 벌채하고 나무를 심은후에 심은 나무가 자라면 나머지 줄의 나무를 벌채하여 조림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했다. 73년도 산림과에 근무할때는 추풍령식 조림현장을 견학하여 산에 푸르름을 유지시키는 현실을 보았으나 10.26사건으로 비운의 운명을 다함에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본 칼럼은 본지와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