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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홍난파와 현제명
신도성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7/10/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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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에 대한 오해와 진실(4)

 

서양음악의 선구자 홍난파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음악가들은 모두 다 돌아가셨고 살아계신 원로 음악가들도 활동을 못하신다. “그 사람을 알려고 하면 친구를 보라”는 말도 있듯이 홍난파를 바로 알기를 위해서는 홍난파와 같은 시대 활동했던 음악가를 찾아보니 그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현석 현제명(玄石 玄濟明)이다.

 

현제명은 미국 시카고 건(Gunn)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고 1929년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서 연희전문학교 음악부장으로 재직했다. 1931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가 결성되었을 때에 홍난파와 함께 참여해 창립총회에서 현제명이 이사장으로 그리고 홍난파는 상무이사가 됐다. 그해 2월 조선일보에 현제명을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풍자만화와 함께 그를 “얼른 보면 미국 대통령 후버같고 또 어찌 보면 남양군과도 같은 남성적이면서도 순후해 보이는 이가 현제명 씨다. 그러나 ‘굿바이’ 노래할 때에는 어디서 오는 애교인지 굴곡이 많은 얼굴에 오색 꽃이 난만해진다”라고 묘사했다. 

 

홍난파가 주로 바이올린 연주와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우리나라 서양음악을 개척하였던 반면에 현제명은 성악을 하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음악에 커다란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홍난파가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인 1933년 10월에는 조선음악가협회 주최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홍난파, 현제명 작곡 발표회’가 열렸다. 음악회를 통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가곡들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홍난파가 작곡한 ‘봄노래’ ‘옛 강물 찾아와’ ‘장안사’ ‘금강에 살으리랏다’ ‘관덕정’ ‘옛 동산에 올라’ ‘입 다문 꽃봉오리’ ‘산에 올라’ ‘봄처녀’ ‘그리움’ ‘사랑’ ‘새가되어 배가되어’ ‘소경되어지이다’와 현제명 작곡의 ‘가고파’ ‘뱃노래’ ‘물레방아’ ‘절룸바리’ ‘이마음’ ‘그집앞’ ‘진달래’ 등이 발표됐다.

 

이 가운데 가곡 ‘고향생각’은 홍난파와 현제명이 같은 제목으로 작곡했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로 시작되는 ‘고향생각’은 홍난파가 작곡했다. 같은 제목으로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로 시작되는 ‘고향생각’은 현제명이 작곡했으니 지금도 이 두곡의 작곡자를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외에도 두 사람은 같은 무대에서 성악과 가악으로 연주 한 경우가 있었다. 1935년 11월에 경성보육학교 주최로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열린 제3회 추계음악회에서 현제명은 헨델의 ‘메시아’중에서 ‘산은 유쾌히 울리다’를 테너로 독창했다. 홍난파는 비발디 작곡의 ‘A장조 소나타’ 전 악장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에 두 분은 가입했다. 단번 266번 홍난파와 단번 1010번인 현제명은 공교롭게도 1937년 6월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단원들이 검거됐을 때 일본경찰에 검거됐다. 이듬해인 1938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 18명이 대동민우회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기독신문에 발표할 때도 홍난파와 현제명 이름은 있었다. 

 

홍난파와 현제명, 두 분은 식민지 조국에서 음악적인 재능이 탁월하여 한국 서양음악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홍난파는 1941년 8월 늑막염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으나 홍난파 사후에 현제명은 경성후생실 내악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했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설립해 예술학부 초대학장을 맡기도 했다. 현제명의 그외 작품으로는 가곡 ‘희망의 나라로’ ‘오라’ ‘나물캐는 처녀’ 등을 작곡하고 창작 오페라 ‘춘향전’ ‘왕자 호동’ 등을 무대에 올리는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60년 10월에 58세로 길지않은 생을 마감했다. 

 

홍난파와 현제명은 살아있을 때는 함께 음악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같은 무대에서 한 분은 바이올린 연주가로 다른 한 분은 성악가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홍난파가 작곡한 가곡들을 현제명이 부르는 등 합력(合力)해 한국에 서양음악이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어 온 쌍두마차였더니 돌아가신 후에도 두 분의 합력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90호 서울시 홍파동 홍난파의집 대표 이문태(李文台)씨는 1985년 음악동아에서 현제명을 ‘희망의 나라를 설계한 사람’으로 부르면서 “현제명의 음악적일 대기는 성악에서 출발해 창작을 거쳐 음악교육으로 마무리된다. 특히 그의 교육목표는 세계적인 것에 대한 표방이었다. 그는 ‘우리는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스승인 현제명의 일생을 회고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두 분의 인연이 겹치는 이러한 우연의 일치를 보건대 아마도 하늘나라에서도 두 분은 함께 있으면서 합력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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