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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화성시의 산(16) - 남산, 정조대왕이 살아서 보신다면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7/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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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전국의 웬만한 마을에는 ‘남산’이 있다. 도성이 었던 서울에도 있고 개성에도 있고 경주에도 있다. 대개는 한 고장의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북쪽산을 배산으로 하여 남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그 앞은 당연히 남쪽이 된다. 즉, ‘앞산’이 면서 ‘남쪽에 있는 산’을 의미하게 된다. 

 

또 하나는 풍수지리로 볼 때, 명당이라는 곳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이면서 조산(祖山)이나 태조산(太祖山)이 북쪽(북현무)이고 좌청룡과 우백호를 양쪽에 거느리고 남쪽(남주작)으로 안산(案山) 또는 조산(朝山)이 있는데 이 조산이 위치로 볼 때 바로 남산인 것이다.

 

작은 마을에도 남산이란 산이 많은데 우리 화성시에도 두 개의 남산이 있다. 오두지맥(비봉면 태행산에서 매향리 포구)이 지나는 장안면사무소 뒷산이 남산인데 장안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또 하나는 정남면 안녕동, 괘랑리, 보통리를 품고 있는 산으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남산(152.1m)이 다. 아마도 수원고읍(현재의 건릉 주변)의 남쪽의 산이라서 남산이거나 융건릉의 안산으로서 남쪽에 있는 앞산일 것이다. 괘랑리에서는 마을의 뒷산이고 보통리에서는 수원과학대학교 뒷산이라고 부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융건릉이 있는 화산(花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와우리에서 화산과 사나산(태행산)으로 갈라지게 그려져 있다. 수원대학교 뒷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이 지금의 화산이며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남산이다. 화산과 남산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로 봉담에서 병점으로 가는 84번 도로와 봉영대로가 놓여 있다. 

 

남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는 수기교차로에서 안녕남로를 들어가면 청광아파트 단지 옆길이 하나이고, 보통리의 라비돌리조트로 들어가 야외 결혼식장 끝에서 출발하는 두 길이 가장 무난하다. 그 외에도 괘랑리나 산업단지에서 오르기도 하나 대부분 공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사유지라서 들머리를 찾기도 어렵다.

 

리조트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추천하고자 한다. 동서 방향으로 길게 누운 능선길을 걸을 수 있는데 왕복 4km 정도이며 2시간이면 가능하다. 리조트 정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끝까지 가면 야외 결혼식장이 나온다. 여기서 꼬뜨도르정원이라는 낯선 이름의 잔디밭을 지나며 등산은 시작된다. 능선까지는 길이 잘 다듬어져 있고 안내판도 있는데 약 10분 정도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야 한다. 능선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수원과학대학교 테니스장이 나오고 골프장 최상단 지점으로 관리소가 한동 있다. 여기서 한번 더 치고 올라가면 비교적 넓은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남산 정상이다. 출발지에서 천천히 30분이면 도착하고 약 1km 거리이다. 

 

이후 동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데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될 뿐 가파른 곳이 없다. 10분이면 아파트 단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며 한 번 안부로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체육시설과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1분거리의 봉우리에 이르렀다가 다시 처음 들머리로 돌아오면 된다.     

 

남산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산의 동쪽과 북쪽은 공업단지로서 거의 능선까지 공장 건물이 들어차 있다. 반면 남쪽 사면의 괘랑리 방향은 아카시나무가 매우 울창하며 쓰러진 거목들이 난잡하게 널려있고 다닐 수 있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교 소유의 토지라서 방치된 상태로 있으며 출입금지 팻말과 철조망 울타리가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대학교라면 공익적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서쪽 사면은 대학교 건물과 골프장, 리조트 건물이 산을 깎고 들어와 앉아있다. 심한 몸살을 앓으며 현재를 버텨내고 있는 남산의 모습이 안타깝다.

 

“정조 13년(1789년) 7월 11일 국왕의 심중을 잘 알고 있던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으로부터 양주 남쪽 중량포(中梁浦) 배봉산의 영우원은 묘역이 매우 비좁고 초라하여 서둘러 천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다.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이 간절했던 정조는 이를 계기로 숙원이던 선친묘의 천장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정조는 7월 11일 2품 이상의 대신들을 희정당(熙政堂)에 모이게 한 후 이 자리에서 박명원의 상소를 낭독케 하였다. 국왕이 가슴이 막힐 정도로 울음을 삼키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니 대신들은 어느 한 사람도 천봉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글은 정조 임금께서 즉위 초부터 꿈꾸던 아버지 묘소 이장에 관한 첫 출발점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거대한 노론 세력에 맞서며 속으로만 품었던 마음이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계획을 진척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철저한 준비가 있었음을 실록에는 전한다.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마침내 수원부라는 최초의 계획도시로 주민을 이주시키고 최고의 명당 자리로 꼽히는 수원부 용복면(龍伏面) 화산으로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를 이장할 수 있게 되었다. 화산을 조산(祖山)으로 하고 이 남산이 안산이었다. 안산 뒤 멀고 크고 높은 산을 조산(朝山)이라고 한다. 안산과 조산의 역할은 혈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혈의 생기를 보존해 준다. 정조는 이러한 풍수 사상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파헤쳐 지고 깎여진 남산. 옛 모습이 전혀 없이 잡목만 무성한 남산. 정조가 아버지의 능침을 완성하고 이 남산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지금은 아버지 옆에 누워있지만 살아계신다면 어떤 마음으로 남산을 바라볼까. 

 

왕의 장수와 권위를 상징하는 왕릉의 소나무가 무성하여 영원히 푸르름을 간직한 품격있는 남산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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