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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산(17) - 매봉산, 삼일 항쟁의 현장을 보았으리라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8/1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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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일제가 백범 김구보다 두려워했으며 무장 투쟁의 화신이던 약산 김원봉(若山金元鳳. 1898∼1958). 그는 1923년 어느 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찾아온다. 

 

“선생님, 우리 의열단이 무장 투쟁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이 많습니다”

“일본 놈 말고 어느 누가 그래?”

“폭탄을 투척하여 파괴하고 암살을 시도하는 것을 테러라고……”

“테러? 어느 미친 작자야. 강도에게 강도짓을 못하도록 막고 있는데 그게 어찌 테러인가. 테러는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폭력이지만 우리는 뚜렷이 일본이라는 대상이 있고 목표가 있네”

“그래서 말씀인데요. 우리 의열단의 행동 지침이 될 수 있는 선언문을 하나 부탁합니다”

이상은 필자가 꾸며서 만들어 본 단재와 약산의 대화이다. 

 

약산이 의열단을 조직하여 총독부나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매국노, 친일파, 등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을 대상으로 결사적 무장투쟁을 계속할 때, 국내외에서 일부 비판이 있었다. 너무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이라고.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고.

 

단재와 약산은 오히려 그들을 비판했다. 국제적인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소위 ‘외교론자’을 펴는 작자들은 일본의 횡포에 얼마나 놀아나고 있으며, 힘을 키워 민족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위 ‘준비론자’는 얼마나 안이하고 순진 한가를 비판하며 그 유명한 의열단 선언, 즉 ‘조선 혁명선언문’을 선포하였다. 선언문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필자가 이렇게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송산에서의 삼일항쟁이 몇가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송산지구 삼일운동 기념공원에 새겨진 글을 인용하면, 첫째, 화성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만세 항쟁을 하였다는 점 둘째, 고종의 국장에 참여 했던 홍효선과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홍면옥 등이 조직적으로 주도했다는 점 셋째,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등 폭력성을 가졌다는 점 등이다.

 

특히 총을 쏘아 사람을 다치게 한 일본순사가 만세 시위를 하던 주민들에게 맞아 죽게 되는 사태는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없던 일이었다. 폭력은 현실적으로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던 단재의 절규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비폭력 만세운동이 얼마나 무기력한 이상론인가를 실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송산의 주산은 매봉산(108.5m)이다. 1911년도에 발행된 ‘조선지지(朝鮮地誌)’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낮은 산이나 송산면의 중심이 되는 봉가리, 삼존리, 사강리를 거느리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도 매(鷹)를 뜻하는 이름이 많은데 매봉, 매봉산이 그러하고, 한자 음 그대로 매 응(鷹)을 써서 응봉, 응봉산이라고 부르거나 수리(鷲)를 뜻하는 수리산, 수리봉 등이 거의 비슷한 뜻을 갖고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산을 바라보기에 매의 형상을 닮아서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매의 부리처럼 날카롭거나 그런 바위가 있는 산을 일컫기도 한다. 또는 특별한 전설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옛날에 매사냥을 하였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거나 임금이 사냥할 때 매를 놓아 꿩을 잡았다는데서 유래 된 이름도 있다.

 

하지만 ‘수리’는 산을 가리키는 신라말이다. 한자 ‘술(述)’로 쓰여서 산을 뜻함은 ‘삼국사기’에서 ‘서술(西述)’이라는 명칭이 ‘서악(西岳)’으로 변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참조함)

 

태행지맥이 남양반도의 길목인 성목쟁이 고개 (청원초교 앞 삼거리)를 지나 마침내 당성이 있는 구봉산을 일으키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화리 와룡산으로 간다. 이때 아지미고개(윗정도리의 마산포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송산초교 방향으로 살짝 비켜 뻗어 이룬산이 매봉산이다. 어찌 보면 독립된 산이다.

 

들머리는 송산 도서관을 끼고 돌아 올라간다. 배수지가 나오는데 울타리를 따라 오르면 된다. 바닥에 부직포를 깔아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정상까지 10분이면 된다. 정상은 넓은 마당으로 화성시에서 설치한 정자와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다. 

 

북쪽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는데, 이 북쪽 마을은 면사무소 앞으로 새로 난 매봉산길 73번 지구이다. 완전히 전원주택지로 개발이 되어 있어 산의 중턱 이상까지 주택이 지어졌고 정상까지 5분이면 될 정도다.

 

전원주택지 아래로 골짜기 건너편에는 유명한 홍씨 3형제 묘역이 있다. 삼일항쟁 당시에 투쟁을 했던 홍남후, 홍열후, 홍관후의 무덤으로 비석에는 남양 홍씨 삼형제 삼일운동기공비(南陽洪氏三兄 弟三一運動紀功碑)라고 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은 희미하고 칡덩굴만 무성하여 접근이 어렵다. 그 능선 너머 삼존1리에는 역시 삼일항쟁에 참여한 김용준의 묘소가 있다 했는데 파묘의 흔적만 있고 오직 억새만 우거져 있어 씁쓸하였다. 2003년에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찾아가니 주소가 도로명으로 바뀌어 찾아가기가 몹시 힘들었다. 15년 전 자료를 가지고 간 필자가 스스로 한심할 뿐이다.

 

정상에서 계속 전진하다보면 봉우리가 하나 나오는데 매봉산의 가장 동쪽 봉우리에 해당한다. 여기서부터 제법 숲이 우거지고 어느 정도 경사도 있어 산행하는 기분이 든다. 계속 내려가면 봉가리에서 삼존리의 큰당뫼로 넘어가는 고개(개목골. 삼존서길73번길)에 이르는데 이 고개 이름을 아는 주민이 없어 지도를 찾아보니 개목골이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다시 되돌아 올라가서 원점으로 가는 코스를 권한다.

 

(ykl5712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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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7 [03:40] 수정 삭제  
  독립운동가 = 노비들의 양반, 공산주의자 =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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