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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⑦ 기와이기
김홍도 시대 한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9/06/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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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히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단원풍속도첩>> 중 <기와이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그림1. <<단원풍속도첩>> 중 <기와이기>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2. <<단원풍속도첩>> 중 <기와이기>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3. <<단원풍속도첩>> 중 <활쏘기> 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사진1. 움집     © 화성신문


▲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① 대패질하는 목수의 오른손을 잘못 그렸다.(그림 1)

 

② 대패질하는 목재가 수평으로 놓여있지 않다. 목수로부터 가까운 쪽 받침대는 높고, 먼 쪽 받침대는 낮다. 먼 쪽 받침대는 목재를 지탱하기조차 불안정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대패질이 불가능하다.(그림 1) 참고로 조선의 대패는 몸 쪽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라 몸 쪽에서 바깥으로 미는 방식이다.

 

③ 대팻 밥이 말리는 방향이 반대이다. 위로 말려야 정상이다.(그림 1)

 

④ 다림 작업을 하면서, 오른편 눈은 감고 왼쪽 눈으로 가늠한다.(그림 2) <활쏘기>의 화살이 곧은지를 점검하는 인물도 똑 같은 행동을 한다.(그림 3) 익살스러운 트릭이다.

 

⑤ 건축공정이 뒤죽박죽이다. ㉠한옥의 정면과 측면에 가로대는 인방(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가로재)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와이기를 하며, ㉡ 기둥을 세울 때 하는 다림 작업을 뒤늦게 기와이기 공정에서 하고 있다. 

 

⑥ 지붕이 중국의 경산(硬山 맞배지붕과 유사하나 건물 측면의 지붕이 돌출되지 않는다) 양식이다. 

 

▲ 잡설 김홍도 시대 주거 문화

 

# 240여 년 전, 옛 수원부 읍치(현 화성태안3지구) 원주민들의 주거 형태

 

1789년(정조 13)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시 화산동 화산(花山) 자락으로 이장(현륭원, 현 융릉)하기 위해, 현재의 화성태안3지구에 소재했던 옛 수원부 읍치 행정기관과 원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보상 관련 사료를 검토하면,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옛 수원부 1차수용은 244호였지만, 아전 “나태을”의 집만 기와집이었다. 그렇다고 나머지 모두 초가집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는 땅을 파서 바닥을 다진 뒤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갈대, 짚 등을 덮어 만든 움집에서 거주했다(사진 1). 한반도의 움집은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 초기까지 널리 이용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하층민들의 주된 주거형태였던 것이다. 

 

   이를 사료로 확인해 보자. 1790년(정조 14) 2월 19일 좌의정 채제공은 정조에게 옛 수원부 주민 절대 다수가 움집에서 살았음을 아뢴다. “일전에 수원(水原)의 새 고을에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방안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본부(本府)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원래 가난하게 살아오던 터이어서, 옛 고을(현 화성태안3지구 일원)의 1천여 호에 가까운 집들이 달팽이집처럼 생긴 오두막뿐입니다.” *<<정조실록>> 1790년(정조 14) 2월 19일 

 

# 기와지붕의 폐단

 

  한옥 주택에 대한 인기가 높다. 전통가옥형태에 현대식 건축공법을 접목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정작 정조 시대에는 청나라를 방문하여 중국식 주택문화를 경험하였던 북학파 지식인 사이에서는 한옥 비판론이 제기됐다. 연암 박지원도 한옥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조선식 기와제도에 불만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청나라 주택)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으며, 뱀이 서리고,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한국고전종합DB

 

  조선은 “가난해서 가난한 것처럼” 주거문화가 낙후하다보니, 건축공법은 물론 자재도 저급했으며, 표준화(규격화)조차 되지 않았다. 당대 대학자서유구는 “즐비한 집마다 하나도 법에 맞는 것이 없다. 도대체 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한탄했다. 

 

   생산과 소비의 구조 역시 원시적이었다. 수요가 있을 때만 자급자족 식으로 기와를 구워 조달했기 때문에 건축자재 시장은 형성되지 못했다. 규격과 품질이 제각각임은 당연했다.   

 

   1790년 2월. 채제공은 시험적으로 수원부에서 기와 생산을 통해 공산품의 유통시스템을 정착시키자고 건의한다. “만약 1만 냥 안팎의 돈을 시험 삼아 본 고을에 내주어 기와를 굽게 하여, 사려는 사람들에게 팔되 절대 이익은 취하지 말고 본전만을 받는다면, 기와집을 어느 정도 세울 수 있고 나라 돈도 축내지 않을 것입니다.” *<<정조실록>> 1790년(정조 14)년 2월 19일  

 

   즉, 시험적으로 기와산업을 지원·육성해 산업의 다변화를 모색하고 전문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며, 공산품의 생산과 유통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매개체로 활용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스스로 가난과 낙후를 치유할 능력이 없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기와집은 풍요의 상징으로 남았다. 남·북한의 지도자는 이구동성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기와집에서 쌀밥과 고깃국을 배불리 먹으며 살자”를 슬로건으로 걸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한반도에 살던 우리민족은 지독하게 가난하였던 것이다.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가난과 낙후에서 탈출했지만, 도리어 기와집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 아파트로 주거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한옥주택에 대한 향수는 국력에 비례하는 듯하다. 

 

 

주찬범 향토작가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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