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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호 교수의 Leadership Inside 98]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세상에서의 리더십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0/01/1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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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화성신문

요즘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많다. 필자의 초등학교 친구 중에 최근 ‘성탁’이는 ‘도겸’으로, ‘재심’이는 ‘경희’로, ‘용자’는 ‘양자’로 개명을 했다. 그래서 가끔 동문회 사이트에서 낯선 이름을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걔가 누구지?” 하고 물어 보면, “이름 바꾸었어. 몰랐니?” 하는 대답을 듣게 된다. 학교에서도 지난 학기와 이름이 달라진 학생을 보게 되어 당황할 때가 있다. KBO리그에 등록된 야구선수가 매년 600여명 되는데 이들 명단을 조사해 보니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31명이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dongA.com, 2017. 2. 17). 그러니까 한 해 6명꼴이다.

 

과거에도 개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고 정말 특별한 것이었다. 호적 신고가 잘못 되어 실제로 부르는 이름과 다르다든지 또는 현재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힘든 특별한 일이 발생되었을 때만 행해졌고, 법원에서도 이를 엄격히 제한해 왔었다. 사실 사람들이 이름을 함부로 바꾼다면, 사회에는 대 혼란이 있을 것이다. 이름을 바꾼다면, 거래했던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범법자가 자신의 신분을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도 그렇고, 결혼을 위해 선을 볼 때도 그렇고 상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도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름은 바로 ‘나 자신’을 말해주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를 표현해 주는 것을 넘어서서 나의 뿌리와 소속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고 또 가문의 항렬을 나타내는 돌림자까지 들어간 경우가 많다. 필자는 외국 유학할 때 난 딸아이들한테 돌림자인 법헌(憲) 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우리 가족 내에서는 예쁜 이름을 두고 어려운 이름을 지었다고 계속 불평이 있었지만 그걸 바꿀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이름 바꾸는 이유가 옛날 기준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가 한번 바꾸어 보라 해서’ ‘새 출발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이름은 주어진 것이고, 고정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름도 변화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름은 여전히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과거에는 제도적으로 또는 타인에 의해 정해졌었는데 이제는 각 개인이 선택하고 변경시켜나가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을 반영하여 2005년 대법원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과 ‘인격권’을 위해 성명을 바꾸는 것을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그 때 이후 개명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1만 건, 2000년대 초 5만 건 정도였던 연 개명 건수가 2005년 이후 16만 건을 넘어섰다.

 

사고의 중심축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양성이 대세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는 사실, 가문의 항렬이 들어있다는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의 삶이고 현재의 나의 취향이다. 틀에 짜여진, 이미 정해진,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쉽게 규정 되는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름으로 전혀 쓰지 않던 글자나 단어도 과감히 이름으로 쓴다. ‘하늘’ ‘바다’ ‘4월’ ‘5월’이 그렇다. 그러고 이런 이름을 ‘이쁘다’고 한다.

 

이런 추세는 소비취향과 직업선택으로도 나타나고 삶의 양식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소유보다는 소비나 경험을 강조하고,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중시한다. 음식 값에 맞먹는 가격의 커피를 마시고, 재미가 없다고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다.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는 것보다 휴가를 모아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 우선이기도 하다. 매년 소비자 트렌드를 발표하고 있는 서울대 김난도 교수팀은 단지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에서 다원적 정체성을 갖는 ‘멀티 페르소나’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직장에서의 나’와 ‘퇴근 후의 나’가 다르고, ‘오프라인에서의 나’와 ‘온라인에서의 나’가 다르다는 것이다. 

 

‘제도적 정체성’ 시대를 살아온 나이든 리더들은 ‘선택적 정체성’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그들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감은 못하더라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과의 관계는 끝이다. 그리고 리더의 시각으로 단정하고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가능한 한 그들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흔히, 60대인 어른이 20대에게 “너는 60대를 살아 보았어? 나는 20대를 살아 보았거든”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는데 지금 20대가 살고 있는 삶은 60대가 살았던 그 삶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choyho@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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