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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장기요양 서비스 미담사례를 담은 체험 수기 공모전 당선작 소개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0/01/1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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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는 ‘행복 전도자’입니다 

 

▲ 김선녀 요양보호사     © 화성신문

어르신과의 첫 만남은 2016년 6월 무더위가 한창 시작될 무렵이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처음 취득하고 수년간 ‘장롱면허’로 방치하다가 현재 어르신을 만나기 1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진 어르신과 루게릭병 어르신 두 분을 저 먼 하늘 나라로 보내고 상심에 가득차 있을 무렵이였다.

 

 어르신은 뇌경색으로 10년 전에 쓰러져 편마비로 노인장기요양 3등급을 받으신 73세의 여성 어르신인데 성격도 급하실 뿐만 아니라 워낙 깔끔하고 케어에 100% 만족이 없으면 화를 버럭 내시는 분으로 케어를 들어가기 전에도 1년에 요양보호사가 4명이 바뀔 정도로 말 그대로 ‘완변주의’ 어르신이였다.

 

당시 어르신은 오른쪽 손과 발의 편마비로 지팡이와 보행기로 이동이 가능하고, 우울증과 업다운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통풍, 요실금으로 약도 많이 복용하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상태의 어르신을 과연 케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부담도 되었다. 더더구나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고 1년 사이에 두 분의 어르신을 보내고 난 뒤 찾아온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과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하였다.

 

첫 출근 후 약 3개월 가량은 과거에 어르신을 거쳤던 다른 요양보호사처럼 나도 정신과 육신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 보다 더욱 나를 힘들게 밑으로 끌어내렸던 것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케어해도 어르신에게 심적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이 나를 오히려 힘들게 하였다.

 

어르신 케어 3개월이 조금 지난 어느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어르신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는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어르신과 이른바 ‘담판’을 지어 내가 어르신 케어를 그만두던지 아니면 어르신이 다른 요양보호사로 교체하든지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어르신과 마음먹고 단 둘이 마주 앉았다.

 

나는 어르신이 현재 무엇이 힘드시고 또 내게 아쉬운 것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조심스래 설명을 하고 어르신의 답변을 기대했지만 어르신은 오히려 스스로의 변명만 늘어 놓으면서 심적 변화가 없이 그렇게 또다시 3개월 넘는 시간이 흐를 무렵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출근을 하자마자 어르신이 다짜고자 집에 어르신의 돈 6만원이 없어졌다고 화를 내면서 나를 의심하고 도둑으로 몰아 너무도 어이가 없고 분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억울하기도 하여 결국 보호자에게 자초지정을 얘기하고 다음날 출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회사에서 급히 케어할 요양보호사가 없어 다음날 어르신 댁으로 결국 출근을 하였다.

 

출근 하자마자 잃어 버렸다는 그 돈은 전날 어르신 댁 근처 복지관에 갔다가 노래교실 회비를 내던 중 어르신이 돈을 실수로 흘려 그 돈을 다른 옆에 어르신이 주웠다고 노래교실 회장에게 연락이 왔다는 보호자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어르신과 보호자분이 나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였고, 나 또한 누명을 벗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어르신에게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어르신은 종종 어르신의 고민을 나에게 얘기하였고, 심리상담 자격증이 있는 나는 어르신의 입장에서 상담을 해 주었고 그로 인해 차츰차츰 짜증내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당뇨와 혈압은 규칙적인 약복용 및 보호자와 상의하여 음식도 조절하였고, 또한 내가 케어하는 시간에는 간식 식단도 조절해 많이 호전된 되었다. 무엇보다 우울증으로 업다운 심했는데 지난 3년 반이 넘는 시간동안 허물없는 대화와 소통으로 지금은 우울증도 거의 치유되었다.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았던 어르신과의 불편하였던 관계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어르신과 나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요즘은 출근을 하면 “어머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하면 사심없이 인사를 하면 웃으면서 반겨주는 어르신은 이제 대상자 어르신이 아니라 먼저 돌아가신 나의 친정 어머니를 대신하는 새로운 ‘친정 어머니’의 관계로 형성되어 버렸다.

 

지금도 다른 현장에서 어르신들께 서비스를 하고 있는 많은 요양보호사들이 고충이 있을 때마마 나에게 어르신을 잘 모실수 있는 상담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종종 말한다. 요양보호사가 어르신들에게 밥이나 해주는 ‘파출부’로 생각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야 한다고 말한다.

 

정서적으로 또는 육신적으로 외롭고 소외된 힘든 어르신들을 한 분 한 분 케어 하면서 말벗이 되어주고 도움을 나누어서 어르신들이 호전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요양보호사로서의 무한한 자부심과 보람을 늘 느끼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내가 어르신 케어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또한 나의 케어를 받기 위해 오늘도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을 위해 ‘행복한 일터’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에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끼기에 나는 오늘도 요양보호사로서 어르신들게 행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자’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최우수상] ‘파독 광부 어르신의 행복한 동행’

▲ 송정심 독거노인생활관리사     © 화성신문

“음식물쓰레기 제가 버리고 올께요”

“어머! 아저씨! 이런 건 여자들이 하는 건데요.”

“아니예요. 저는 스위스에서 오래 살아봐서 익숙해요. 하하하……”

“멋쟁이 어르신이시네……”

 

이와 같은 일은 전○○어르신의 점심시간 아파트 경로당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내가 전○○어르신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쯤 이었다. 시에서 실시하는 65세 이상 독거 어르신 현황 조사 파악 때문에 가가호호 방문을 하는 때였다. 한 동안 뉴스에서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알려지고, 비슷한 방문 사기 등도 많았던 때라서 주민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 다반사이고, 초인종을 눌러 방문이유를 밝히면 외판원 취급을 하던 때였다. 전○○어르신 댁의 벨을 눌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신분을 밝히고 방문이유를 말씀드리자 마지못해 현관문을 열어 주시었다. 체격이 엄청 크신 어르신, 그러나 그늘에 드리워진 무표정한 얼굴과 어딘가 힘들어 보이시는 그 분의 모습은 지나온 세월 속에 무겁게 느껴지는 삶의 고뇌가 진하게 묻어있었다.

 

“혹시 어디 많이 아프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사는 것이 힘들고 아프다고 하셨다. 나는 혼자 지내시느냐고 물었고, 가족 관계를 묻는데 체격에 어울리시지 않게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전○○어르신의 삶은 이랬다. 고향은 북한 원산이고 6・25때 월남하여 실향민으로 대구에서 어머니, 형과 함께 힘든 세월을 보내다가 다행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국가적인 어려움 때문에 어르신도 독일 광부를 희망하여 독일로 떠나셨다고 한다.

 

독일에서 파독 간호사로 온 한국 아가씨와 만나 결혼을 했고, 슬하에 딸을 둘을 두게 되었지만, 외국에서의 험난한 삶은 결국 이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정처 없이 스위스로 흘러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국에 계시던 형수님의 소개로 초등생 아들을 둔 젊은 한국 여성과 재혼을 하게 되었고 15년 정도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으며,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 아들을 위하여 부모로서의 역할을 넘치도록 하셨다고 한다.

 

그 후 좀 더 안정된 노후를 위하여 귀국하여 안양에서 터를 잡아 3년 정도 살던 중 의붓아들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주장하는 아내와 의견이 충돌하여, 아들과 아내에게 살던 집과 재산을 다 넘기고 다시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숨을 쉬셨다. 아내를 믿고 한국에 들어왔건만 씻을 수 없는 배신감에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며, 친구의 도움으로 화성으로 이사하여 그나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에, 하나 밖에 없는 그 친구마저도 치매로 인하여 요양원에 입원한 후로 자신은 외로움과 삶의 한스러움에 지쳐가고 있으며, 하루 종일 혼자서 지내다 보니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죽어가게 되겠구나!’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울증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신다. 날마다 술이 없이는 잠을 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생활을 영위해나갈 자신도 없다하시면서……

 

그날 후로 전○○어르신은 내 담당이 되었다.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외로움을 해소하여 우울증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다행이 나는 대학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였고, 다양한 심리치료 방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실행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먼저 그 분을 식사자리에 초대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음식점을 하고 계신 분들의 봉사심과 배려로 인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식사자리가 한 달에 한 번씩 제공하는 음식점이 한정식, 고기집, 등 다섯 군데가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활용하여 어르신을 동네의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외롭지 않고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두 번째로 한일은 아파트 경로당에 회원으로 등록을 해드려 비슷한 처지의 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마을어르신들과, 전○○어르신처럼 서양에서의 오래 생활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인기 있는 어르신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 시도한 일은 미술심리치료이다. 그 중 ‘그림으로 그리는 자서전’등의 회상프로그램은 과거의 아름다운 장면, 추억이 깃든 물건들에 그 시절의 색채를 입힘으로써,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행복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하여 정서적인 안정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네 번째로 시도한 일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프로그램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함으로써,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아파트 주변 걷기 운동을 30분 이상 하고 주변 운동기구를 이용한 근력운동 30분 등 TV에 의존하지 않고 하루의 생활 중에서 실천할 수 있는 건강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전화로 확인함으로써 의지를 북돋워 드렸다. 또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화성시 자원봉사센터의 지원을 받아 규칙적으로 밑반찬을 제공하여 드렸다.

 

마지막으로 웰다잉 프로그램을 적용하였다. 웰다잉은 웨빙(잘 사는 것)만큼 죽음 또한 품위있게 준비하는 것으로 개인의 삶의 질에 관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시작은 “용서와 화해”이며, 우리 모두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그 분의 삶에서 “용서와 화해”는 질곡이 묻어나는 절대의 과제이며, 편안한 노후와 행복한 마무리‘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한 결과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이면 술을 드시던 어르신이 이제는 경로당에서 인기 만점의 어르신으로 바뀌셨고, 주변의 비슷한 처지의 어르신들을 찾아가 삶의 외로움을 공유함으로써 함께하는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 계시며, 현재 전○○어르신은 다시 추억을 찾아 스위스 여행을 떠나 며칠 후에 돌아오실 만큼 건강도 함께 유지하고 계신다. 어르신은 그동안 유럽생활과의 비교해본 결과 우리나라의 노인복지 수준이 유럽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앞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이러한 변화는 어르신 본인의 노력과 독거노인생활관리사 개인의 능력이라고 볼 수 없다. 튼튼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려는 중앙정부의 노력과,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계획하고 실천하는 지방정부, 그리고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주민자치단체 등이 함께하는 ‘행복한 동행’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수상]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임을’

▲ 홍경숙 독거노인생활관리사     © 화성신문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여러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다.

한동안 서성이다가 뒤돌아서는 순간 덜커덩 잠금이 풀어지는 현관문.

손으로 밀어보니 바닥에 어린이와 같은 체구에 바짝 마른 몸의 어르신께서 주저앉아 계셨다.

 

“김○○ 어르신 맞으세요?” 물으니 고개만 끄덕인다.

아이고! 어디 많이 아프세요?”라며 재차 물으니 “굶어서 굶어서…. 너무 배가 고파서…….” 어르신의 목소리가 가늘고 힘없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어르신의 상황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무조건 뛰고 있었다.

 

내 귓가에 “굶어서…. 굶어서…. 너무 배가 고파서….”라는 어르신의 음성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이웃집으로 가서 밥과 국을 얻어와 죽을 만들어 어르신의 입속으로 넣어드렸다.

 

어르신께서는 농촌에서 살다 요양원으로 가셨고 퇴원과 동시에 아파트 밀집 지역인 나의 구역 임대 아파트로 입주하신 분이다. 주방을 보니 밥통은 고장이 났고, 조리기구 및 가스레인지도 없이 하루하루 지내고 계셨다. 너무 배가 고팠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하루 이틀 사흘이 흘러갔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을 본 것이 독거노인생활관리사인 나였다고 한다.

사흘 동안 어르신께서는 좁은 아파트 방안에 계시며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프다.

 

그 후 나는 어르신의 상황을 파악 후 지역 내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고, 그 결과 지역 내 주민센터와 복지관으로 연계를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어르신과 지역사회가 하나가 되어 돌봄이 시작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어르신은 지역사회 돌봄 안에서 아파트 생활은 물론 복지관 생활도 익숙하게 지내며 잘 웃고 계신다.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어르신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그때…. 선생님이 안 왔으면 아마도 죽었을 거야…. 선생님은 생명의 은인이여….”

어르신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나는 웃으면서도 가슴 한쪽에서는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어르신을 만나 뵐 때마다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어르신 살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매일 아침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 생각한다.

오늘은 우리 어르신들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나를 또 가슴 아프게 했던 어르신이 기억이 난다.

연예인이셨던 한 어르신을 알게 되었다. 이 어르신 또한 매달 기초 생활 수급비로 생활한다.

질병이 많아 여기저기 병원 검사비가 생계비를 위협한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나 좀 살려줘요” 그리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끊어진 전화에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어르신은 며칠 동안 계속된 설사로 탈수증상이 있었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부리나케 병원으로 모셨고, 검사 결과 다행히 장염으로 확인되어 수액을 맞고 안정을 되찾았다.

 

어르신이 정신을 차리시자 나는 어르신께 이런 일이 발생함에 속상한 마음을 전하였다.

“어르신 급히 할 땐 119를 부르세요! 왜 이렇게까지 참고 있었어요!” 나의 목소리에 어르신은 “돈이 만원 밖에 없어서 못 불러서” 그래서 어르신께 “어르신 119는 돈을 안 받아요.”라고 말씀드리니 어르신께서는 그래도 제일 1순위로 위급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다고 말한다.

 

어르신의 1순위에 내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름 이 일을 하며 보람도 있었지만, 어르신에 곁에 따뜻한 가족이 함께하지 못함에 또 눈물이 나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나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오늘도 어르신들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마음에 새기는 구절이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 해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그리고 다시 한번 온 맘 다해 마음으로 다짐한다.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어느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나의 선물이기에 보잘것없이 여기지 않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항상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회의 약자 편에 서고 싶다.

나는 오늘도 어르신들의 손을 어루만지고 어르신들의 일상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웃는다. 이 순간이 행복하기에.

 

 


 

[장려상] 어르신~~~!! 얼굴이 어두우신데,,,,,,,,무슨일 있으세요?

▲ 신명화 독거노인생활관리사     © 화성신문

어린 시절 부터 바다 바람은 유난히도 차갑고 시리다는 이야기만 전해 듣던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이곳은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곳으로 바닷물이 열리는 곳입니다.

저는 송교리 은수포라는 동네 너머 산등성 끝자락 고지대에 외롭게 홀로 살고계시는 김○○어르신의 안전확인을 위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 반갑게 맞아주시며 좋아하셨지만 마음속 근심과 염려, 보이지 않는 눈물을 얼굴에서 읽을수 있었기에 더욱 관심과 사랑으로 안부전화와 방문을 하였습니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어느 날...차량도, 사람도 갈수 없는 길에 서서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어르신께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무일이 없다고는 말씀하시지만 힘없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듣고선 걱정이 되어 무작정 어르신댁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르신을 만나뵈니 어둡고 그늘진 모습이셨습니다. “어르신, 무슨일 있으세요? 제가 비밀을 지켜드릴테니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비밀 지켜줄것을 거듭 당부하시면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으셨습니다.

 

3형제를 두셨는데 5년전 큰아들의 사업실패로 살던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큰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큰아들의 고통을 차마볼수 없었던 형제들은 땅문서를 내놓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큰아들의 빚 청산을 지원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완전히 해결 못하여 현재까지 몇 년 째 동생들의 눈을 피해서 어르신댁을 가끔 방문하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으시다며 몹시 슬퍼하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5년 전 땅을 처분할 때 발생한 거액의 양도세가 추징되었으나 갚지 못하자 계속해서 독촉장이 날아오는 상황이라 하시며 다른 아들들은 이 상황을 모르고 있고, 어르신이 갚을 능력도 없으니 너무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이루고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 또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 받은 후 죽으려고 자살을 계획하고 계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편지를 보여줄 수 있냐고 하자 어르신은 다시 한번 비밀을 지켜주길 당부하시며 장롱 깊숙히 넣어둔 편지를 꺼내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세무서, 화성시청 등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후 어르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해결방법을 알아본 결과 채무능력이 없기 때문에 빚이 탕감되어 잘 해결될 거라고 상세히 안내해 드렸습니다.

어르신께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며 한참을 저를 끌어안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어르신과 손을 잡고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박수를 치며 위로와 축하를 해드리며 진심으로 어르신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그동안 마음의 고통과 걱정으로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잤는데, 이제부터는 밥도 잘먹고 잠도 잘자고 죽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남은 인생을 잘사시겠다고 다짐을 하셨습니다.

 

손을 흔들며 배웅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독거노인 생활관리사의 업무가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으며,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책임과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장려상] ‘친정엄마같은 우리 어르신들, 항상 감사합니다.’

 

 

▲ 권귀임 독거노인생활관리사     © 화성신문

여느 날처럼 안부 전화를 드리며 “어르신 이번 주 금요일 17일에 최○○ 순댓국에서 식사 연계 있어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경상도 사투리로 “그래, 고맙데이. 밥은 묵고 다니나.” 하시면서 “항상 고마워요, 선생님” “우리 자식보다 났데이. 우리 딸보다 났데이.” 하시며 웃으신다.

 

항상 드리는 안부 인사지만 생활 관리사로 일을 하면서….

2019년 5월 17일 금요일을 지금도 난 잊을 수 없다.

 

동탄3동에 있는 최○○ 순댓국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서비스연계로 식사를 후원해주시는 날이었다. 식사 후원이 있다고 일주일 전부터 말씀드리고. 주말 지나고 월요일, 수요일 그리고 전날에도 통화했던 터라 당연히 잊지 않고 나오시리라 믿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내 차로 모시러 가고 집이 가깝고 거동이 좀 건강한 어르신께서는 걸어서 식당으로 직접 오신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도 오시질 않으시고 전화도 받질 않으셨다. 항상 같이 오시는 어르신께 여쭸더니 “오늘은 노인정에도 안 나왔던데”.

“별일 없을 거야 어제도 봤는데” 하시며 내가 안절부절못하니 너무 각종 마라고 하셨다.

전날도 전화통화를 아주 반갑게 받으시며 내일 봬요, 까지 말씀드렸는데….

좀 예감이 불안했다.

며느님께도 전화를 드렸더니 지난주 통화하셨다고 했다.

 

박○○ 어르신께서 요즘 부쩍 자꾸 깜박깜박 잊으시고 약간 치매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며느님께도 말씀드려 놓은 터였다.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걸어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러자 잠시 후, 아드님께서 도착하셨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이상했다. 눈을 뜨더니 다시 감으셨다.

순간 재빠르게 119에 전화를 걸어 인근 한림대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시고 그렇게 주말을 지나 월요일쯤 검사를 받으셨는데 ‘급성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연세도 88세 고령이시고. 병원 의사 선생님 말씀이 “큰일 날 뻔하셨네요.” 하셨다.

‘아, 어르신들이 그러다 순간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심장이 떨리고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났다.

주변 어르신들께서도 고맙다고 하시며 “항상 한결같은 선생님 고마워요.”라고 하시며 선생님 덕분에 살았다고 큰일 날뻔했다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네~ 어르신, 저도 어르신과 함께여서 행복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라고 감사의 인사 말씀을 드렸다.

 

그 후로 어르신께서는 나만 보면 고맙다는 말만 하신다.

나에게도 올해 90세 된 친정엄마가 홀로 계신다.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 잘 듣지도 못하시고 전화를 안 받아서 놀라서 가보면 진동으로 되어 있곤 해서 도착해 엄마를 붙들고 놀라 울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 놀랍긴 하지만 엄마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는 든든한 마음으로 가슴이 철렁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엄마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린다

 

그 후로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더 진심으로 더 사랑으로 다가가게 되고….

친정엄마께도 오래 사시라고 건강하게 오래만 사시라고 말씀드린다.

내가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이 일을 할 때마다 더욱더 자부심이 생기고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도 더욱더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에도 참여해야겠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던 보람이었을까?

사회 복지의 날에 사회복지협의회에서 국회의원상을 받았다.

진정 어르신을 위한 자세가 무엇인지 어르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오늘도 최선을 다해 내일도 업무에 임해야겠다…….

 


 

 

[장려상] 긍정의 마인드가 치유

 

▲ 신정이 요양보호사     © 화성신문

마냥 늙지 않고 내 옆에서 항상 건강하게 그리고 정정하시리라 생각했던 친정 엄마가 2008년 가을 갑자기 집안 거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셨다. 그로 인해 돌봐드릴 사람이 필요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모두 바빠 어쩔 수 없이 내가 자식 된 도리로서 하던 일을 포기하고 엄마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1년 가량을 친정에 왔다 갔다 하면서 친정 엄마를 돌볼 때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고 있는 친구의 권유로 요양보호사라는 제도에 대해 알게 됐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엄마와 나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2009년 2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래서 요양보호사 교육 이수 후 동부케어(현 사회적기업)에 등록을 해서 일을 시작하였고 엄마를 적극적으로 돌봐 드렸다. 자식된 도리로서 정성껏 모셨지만 워낙 고령이시라 어머니는 오래 사시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엄마의 사고로 나의 직업은 요양보호사로 인생이 바뀐 셈이다. 지금은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큰 책임 아래 일을 하고 있지만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른 어르신을 처음 케어할 때 생각을 하면 사람이 사람을 케어한다는게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새삼 몸으로 부딪쳐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처음 케어를 하였던 어르신은 75세 치매 여성 어르신이였는데 거친 형태의 말투는 평범한 가정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쉽사리 적응하기 힘들었다. 더더구나 자격증을 취득하고 친정 어머니를 처음 가족케어로 일을 시작하였던 나는 그 같은 거친 환경속에서는 도저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케어하던 어르신은 비록 치매가 있으셨지만 과거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시면서 일하는 시간동안 쉼없이 말씀을 하셨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작품을 읽어 내려가듯 어르신을 삶의 여정은 나의 친정 어머니와도 흡사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 오신 것을 듣으면서 어느새 내 눈가에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르신을 4년째 모시던 지난 2014년 겨울 당뇨 합병증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시고 병마와 싸우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친정 어머니와 대화하던 것 같은 연상들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친정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오버랩’되어 아직도 가끔 머리에 오르내리고 있다. 

 

현재는 홀로 사시는 두 분의 어르신을 케어하고 있다. 오전에는 치매 3등급 여성 어르신과 오후에는 시각장애 4등급 남성 어르신이다. 두분 다 혼자 생활하시기에는 환경과 여건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있다. 

 

물론 10여년 동안 요양보호사로 갖추어야할 교육과 소임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대처도 빨리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간 날 때마다 교육을 받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매월 교육과 보수교육은 기본이고 치매교육과 활동보조인 교육 등을 지자체를 통해 이수하였다.

 

특히 어르신들의 치매부분을 이해하기 힘든 돌발 상황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60이 넘은 조금 늦은 나이임에도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노인놀이 치료사 양성과정과 전통놀이 지도사 자격증을 이수해 현재 일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케어해 드리는 치매 어르신과 함께 하면서 갑자기 일어나는 행동변화에도 잘 지금은 어려움없이 잘 대처하고 있다. 물론 어르신 담당의사와도 정기적으로 소통하며 공조하고 어르신 병원 동행이나 약 복용 상담부분도 함께하며 도와드리고 있다. 

 

특히 긍정적인 마인드로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있으면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인정해 줄 때 불안해하던 어르신의 표정이 편안해지며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볼 때 요양보호사사는 직업이 참 어려운 직업이지만 긍정의 마인드로 어르신들이 치유함을 볼 때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50대 중반에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던 나는 어느새 60대 중반을 넘기고 있다. 그러함에도 건강을 주심에 감사하며,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돕고 있지만 머지않아 나도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더욱더 감사하며 사회와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오늘도 하나님께 간절히 감사 기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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