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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엄태정 조각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날마다 조각이 되고, 삶도 죽음도 조각이 되기를”
대한민국 최고 조각가, 1967~1970년 4년 연속 국전서 수상
운명이 되고 숙명이 된 조각, 그 시발점은 성경 속 다윗 왕
5년 전 순수문학 통해 시인 등단, “내 기도는 빛, 빛은 내 조각”
“나는 조각이 초대하고 쇠가 부른 손님, 조각인이어서 행복”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1/05/2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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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태정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 화성신문


  

운명처럼 다가왔다가 맞는 말일까, 아니면 선택함으로 인해 그것이 운명이 되었다가 맞는 표현일까. 선택과 운명이 마치 오작교처럼 연결된 느낌이다. 무언가 길이 열릴 조짐을 보일 때,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아갈 때, 그 무언가가 세월이 흘러 비로소 운명인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엄태정 작가에게 조각은 아무튼 운명이 됐다. 15세 때 조각을 처음 접했고, 오랜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예술분야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예술원 회원 자격은 예술 경력이 30년 이상 되고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예술인에게 주어진다.

 

우둔한 탓에 대한민국 대표 예술인이 화성시에 거주하고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렵게 일정을 맞춰 숙소 겸 작업실이 있는 엄미술관을 방문했다. 봉담읍에 위치한 엄미술관은 엄 조각가의 부인인 진희숙 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화성시 최초 경기도 등록미술관이다. 며칠 전인 517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24회 전국박물관인대회에서 올해의 박물관·미술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대법원 앞에 세워진 조각상. Statue of Law and Right, 법과 정의의 상. Bronze, 700x600x600㎝, 1995  © 화성신문


  

현대조각의 아버지 브랑쿠시와 짝사랑에 빠지다

 

193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 세인트 마틴스에서 수학했다. 26세에 청주교대 전임교수가 됐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를 역임했다. 엄 작가 때문에 학교에 금속 조각 커리큘럼이 만들어졌다.

 

196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육영수 여사의 지시로 국전 상금이 5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랐다. 이듬해인 1968년과 1969, 1970년에도 국전에서 연속으로 수상하면서 추천작가가 됐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2013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예술원 회장이기도 하다.

 

나는 날마다 기도 하나이다/ 내 기도가 조각이 되기를 기도 하나이다/ 날마다 조각이 되고/ 삶도 조각이 되기를 기도 하나이다/ 슬픔이 조각이 되고/ 불행이 조각이 되기를 기도 하나이다/ (중략) / 내 마음이 조각이 되고/ 내가 조각이 되기를 기도 하나이다/ 내 죽음이 조각이 되고/ 내 영혼이 조각이 되기를 기도 하나이다/ (중략) / 그러나 조각이 기도보다 앞서가지 않도록 기도 하나이다//

 

엄태정 작가는 시인이기도 하다. 5년 전 순수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내가 조각이 되기를 기도하나이다에서 자신의 삶이 조각 그 자체가 되기를, 날마다 조각이 되기를 간구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타고난 숙명이 된 조각을 지극(至極)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기를 원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작가의 운명과 숙명의 시발점은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주일학교를 다녔는데 반 이름이 다윋반(지금 표기는 다윗)이었어요. 다윗은 왕이자 장군이자 예술가예요. 반을 지도하던 한덕선이라는 대학생 선생님이 예술가로서의 다윗 이미지를 우리에게 심어주려고 로댕의 청동시대 자료를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하셨어요. 조각 작품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어요. 로댕은 근대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잖아요. 청동시대는 로댕의 1876년 작품입니다.”

 

엄태정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광주승일중학교로 진학하게 됐고, 다니던 교회 주일학교에서 조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이었다.

 

한덕선 선생님께서 나를 지켜보시더니 예술가의 길을 걸으면 좋겠다고 조언하시더군요. 3 때는 수채화로 유명한 배동신 선생님을 소개해주셔서 레슨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선생님은 제가 조각가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신 영혼의 안내자 같은 분입니다.”

 

작가는 배 선생에게서 데생을 배우면서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를 알게 됐다. “조각가의 길을 걸으려면 브랑쿠시를 기억하라는 배 선생의 조언은 엄 작가가 현대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랑쿠시와 짝사랑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금까지도 그의 조각에 매료되어 떠날 수 없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자료 중에 브랑쿠시와 관련된 자료가 가장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 서울대 교정에 세워진 조각상. Double Crane, 쌍학. Bronze, 700x500x500㎝, 1998   © 화성신문

 

▲ 1967년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작품. A Scream, 절규. Steel, 94x136x8㎝, 1967  © 화성신문


  

단순한 것이 아름다워, 예술의 가벼움 경계

 

루마니아 태생인 브랑쿠시는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카레스트 미술학교 졸업 후 유럽을 거쳐 1904년 파리에 정착했다. 2년 후 로댕에게 인정받았지만 큰 나무 밑에서는 잡초가 자랄 수 없다며 조수가 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 브랑쿠시는 자기의 순수하고도 동양적인 오리지널리티를 손상시키지 않고 유니크한 조형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고향인 루마니아 티르그쥬 공원에 있는 브랑쿠시의 무한주’(Endless Column, 1937)입맞춤의 문’(Gate of the Kiss, 1937-38)은 엄 작가가 조각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추구하게 만든 강력한 모티브였다.

 

“1979년에는 그토록 그리던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브랑쿠시 묘소를 찾아서 성묘했어요. 비행기를 24시간이나 탔는데 도착하자마자 꽃다발 사들고 찾아갔지요. 나이 60이 되던 1998년도에는 성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브랑쿠시 생가를 찾아 루마니아로 갔습니다. 그의 조각가로서의 삶의 경로를 눈으로 확인했어요. 그가 자신의 고향에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티르그쥬 앙상블을 만났던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생전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브랑쿠시에 대한 짝사랑은 강렬한 태양처럼 작가의 삶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가는 브랑쿠시 작품을 천지인이라고 표현한 논문을 내기도 했다. 브랑쿠시를 추종하는 루마니아 작가들이 엄미술관에서 제자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오프닝 때는 루마니아 대사도 참석했다.

 

브랑쿠시 작품의 주재료는 라임 스톤이라는 건축 재료예요. 우리말로는 석회암이죠. 입맞춤(The Kiss)이라는 작품은 정으로 쪼아서 만든 작품으로 절대 안보여요. 완벽하죠. 그냥 하늘에서 돌 하나가 툭 떨어졌는데, 그게 이 작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요. 자연스러울 때 아름다운 겁니다. 자연스러울 때 완벽해지는 거고요.”

 

한국 추상조각 1세대인 엄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도 지극히 단순하다. Simple is beautiful.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작가는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요즘 경향을 경계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나치게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태에 대해 변질’, ‘예술의 가벼움’, ‘타락한 예술이라는 표현을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참 아름다움을 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참 아름다움은 자연에 있고, 자연은 독자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어요. 독자성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상태이지요. 이게 자연입니다.”

 

작가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철과 동을 사용한 금속 조각을 통해 한국 추상 조각 1세대로 입지를 굳혔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0년대 초반 철의 물성에 매료된 이후 지금까지 금속 조각을 고수하고 있다. 작가는 평생을 물질의 고유한 물성을 파고들면서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성찰해왔다. 물질에 대한 경외감은 작품 활동에서 일체의 조각적 수사를 빼게 했다.

 

나는 쇠의 물성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어요. 집안이 쇠를 다루는 일을 했고, 어려서부터 철사를 갖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내가 쇠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건방진 생각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쇠가 나를 불렀더군요. 나에게 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 독일 총리 공관에 설치된 작품. Bronze-Object-Age 97-9, 청동-기-시대 97-9. Copper Brass, 120x189x79㎝, 1997  © 화성신문

 

▲ 콘스탄틴 브랑쿠시 작품. Endless Column, 무한주. Bronze, 1937  © 화성신문

 

▲ 콘스탄틴 브랑쿠시 작품. The Kiss, 입맞춤. 석회암, 1907-8  © 화성신문


  

조각은 낯선 자를 만나는 행위, 타자의 궁극은 신

 

엄 작가는 조각이 초대하고 쇠가 부른 손님으로 자신을 낮춘다. 1967년 자신의 대표적 철 조각 절규로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한국 예술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재료 내외부의 상반된 색과 질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구리 조각들을 발표했고, 1980-90년대에는 천지인연작을 통해 수직 구조가 강화된 구리 조각들의 추상적 형태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동양 사상을, 1990년대에는 청동--시대연작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 목가구나 대들보의 형상들을 반영했다. 2000년대부터는 알루미늄 판과 철 프레임을 주재료로 조형성에 더욱 집중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지난 50여 년간 철, 구리,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 재료를 통해 조각의 본질, 삶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색하고 몰입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조각이 무엇이냐고.

낯선 자를 만나는 행위예요. 타자를 만나는 겁니다.

자의 궁극은 신이예요. 격물치지라는 말이 있어요. 사물을 통해 이치를 터득하게 돼요. 사물과의 관계거든요. 내게 조각을 하는 행위는 사물의 곁에 머물러 사색하는, 그리고 조각하는 과정을 통해 안식을 취하는 거예요. 안식을 취한다는 것은 이치를 깨닫는다는 의미예요. 결국 물질의 물성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조형성을 이루는 게 조각입니다. 독자적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겁니다. 그때 공명이 일어나고 공감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는 거예요.”

 

 

▲ 엄미술관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엄태정 작가.  © 화성신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의 윤곽이 그려졌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투박한 자연을 닮은 작품이 예술성이 높고, 디지털문명과 기술에 기댄 화려하면서도 감각만 있는 작품은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작가의 확고한 예술관도 알 수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곳곳에 설치돼 있다. 대법원을 바라보면서 세워져 있는 법과 정의’(statue of law & right), 서울 잠실운동장 앞에 세워져 있는 웅비’, 서울대에 세워진 쌍학이라는 작품도 있다. 독일 총리 공관에는 청동--시대 97-9’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다. ‘통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순수성을 띈 예술작품은 사람을 치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치유는 자유로울 때 일어나거든요. 사색에 몰두하는 삶을 통한 한가로운 삶, 여기에 자유로움과 안식과 행복이 있습니다.”

 

 

▲ 엄 작가가 한 평 남짓 되는 자신의 사색 공간에서 떠오른 단상을 메모하고 있다.  © 화성신문

 


내 마음을 알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작가는 시 내가 조각이 되기를 기도하나이다에서 조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제 조각은 산이 보이고 강이 보입니다/ 이제 조각은 해가 보이고 달과 별이 보입니다/ 이제 조각은 아름다움이 보이고 진리가 보입니다/ (중략) / 세상 모두가 조각되어 밝아졌습니다/ (중략) / 조각은 빛이고 빛은 조각입니다/ 내 기도는 빛이고 빛은 내 조각입니다/ 그러나 조각이 기도보다 앞서가지 않기를 기도 하나이다//

 

김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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