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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이야기]제암 만세운동 재현을 보면서...<1>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한건(?)
 
이길원 기사입력 :  2006/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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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에 들어가는 입구 길가에는 태극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삼일절이 이제 돌아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87년 전 4월 15일 이 제암리의 조그만 초가 교회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살육되었던 우리 선열들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한 시골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믿음으로 살았던 순박한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짓이겨야 했던 그 잔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 이길원 <화성문화해설사>
지나가던 강도떼도 아니고 명색이 한 나라의 제복을 입었던 군대와 경찰이라는 공권력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그 시대 일본인들의 그 정신분열적 행태에 대해서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또 수많은 사람들이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설명을 했어도 나는 그 대목을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저주했는가?
아니면 제나라 독립을 갈망해서 독립만세를 부른 죄가 그렇게 무서운 죄였던가?
착하고, 양순하고, 열심히 일만 하던 조선 농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외쳐대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그렇게 그들에게 두려웠단 말인가?

화성시의 서해안 바닷가에 개죽산이라는 조그만 산등성이가 있다.
그 산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산기슭을 파헤치고 공장을 지어 놨더구먼!
하여간 그 개죽산에서 기미년 3월 어느 밤에 조그만 불길이 신호처럼 타올랐다.

그 불빛을 받아서 꽃당산에서 봉화가 치솟았다.
꽃당산 봉화를 받아서 소남산, 남산에서 불길이 치솟고 드디어 창봉산에서 커다란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북쪽으로는 고주리 천덕산에서, 제암리 진례산에서, 가재리 등재봉에서 일제히 봉화를 올렸으니 전기도 없던 시절 그 캄캄한 밤중에 참으로 장관이었을 게다.

요즘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날 정남면 들판에서 놓는 망월 불놀이보다 훨씬 더 멋있고 참 근사한 불길이었을 거다.

그러나 그 밤은 그렇게 낭만적인 밤이 아니었다.
수백명의 마을 사람들이 산봉우리마다 함께 올라가 외쳐대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그 불길은 우리 화성의 하늘이 울고 땅이 몸부림치던 그 밤에 어둠을 밝히던 처절한 민족의 불길이었을 거다.

자고로 우리 화성은 살기좋은 풍요한 고장이었다.
약삭빠른 일본 사람들도 일찍이 화성에 들어와서 발안 장터에 터를 잡고 서해안 바다를 막아서 농장을 만들고 쌀농사를 많이 지어 도정공장도 크게 짓고 지금 발안농고 자리에는 사과나무도 심어서 과수원을 만들었고, 일본인 상점도 많이 있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일본인 소학교까지 세웠으니 꽤 많은 일본인들이 발안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발안에 살던 일본 사람들이 그 날밤 그 불꽃을 바라보며, 그 함성을 들으면서 그들은 아마 벌벌 떨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재물을 빼앗아서 잘 먹고 잘 산 죄가 무엇인지 깨닫기나 했을런지!

드디어 3월 30일 발안 장날 정오에 그 조그만 장터에 2,000여 명이나 만세꾼이 모였단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당당하게 일본 헌병 주재소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었는데 당황한 일본 경찰이 앞장섰던 이정근 열사를 칼로 쳐서 쓰러뜨리기는 하였으나 성난 군중들이 주재소를 불태우고 우체국을 불지르고 일본인 소학교를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들은 모두 때려 부쉈으니 발안 장터의 타오르는 조선 민중의 불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때 놀랜 일본인들이 허둥지둥 아녀자 43명을 청북면 삼계리 농장의 농막으로 피난을 시켰는데 양감면 고갯길을 숨어서 넘어가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조선이 두려웠을 것이다.

우리 화성에서 독립만세를 제일 먼저 부른 곳은 사강 장터이다.

1919년 3월 27일 사강장터에서 만세꾼에게 총을 쏘던 일본인 순사부장을 타살한 주모자가 홍면옥 선생이라고 전해지는데 홍면옥 선생의 제적부를 살펴보면 도박죄로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

평소에 불령 선인으로 찍혔을 것이고, 트집거리가 없으니까 친구들 하고 화투친 것을 잡아다가 도박죄로 걸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독립운동 지도자의 호적에다가 노름꾼이라고 빨간줄을 그어 놨으니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악랄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4월 3일 우정·장안면민들의 시위 후에 주모자의 읍에서 27명이 일본인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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