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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박성환 서양화가
“액체 충돌 연속 해프닝 액체화, 개념미술 한계 깼죠”
액체화 탄생작 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 교수 “Oh, my god!”
기존 제도권 비순수성에 실망해 작품 출품 안 해, “순수성 잃으면 장사”
액체화 발전시킨 ‘해프닝 물감층화’, “물감 자체가 그림이 된 것”
“나는 영적인 사람, 나에게 그림은 소명, 그리스도 아름다움 찬미”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1/07/0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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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환 작가가 작업실에서 작품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 화성신문


  

모방하는 사람은 많다. 99.9%가 모방이다. 모방을 하는 이유는 창조를 할 수 없어서다. 창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 경지에 도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진이 빠지고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상황까지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아야 한다.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았다고 해서 모두가 창조의 경지로 올라서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도우심, ‘해프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박성환 작가에게는 그렇다. 작가는 창조자다. 앞선 미술 사조의 한계를 깨부수고 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세상에 없는 그림을 그려냈다. 그 작품 세계가 액체화. 작가는 액체화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박 작가는 액체화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해프닝 물감층화를 개발했다. 물감 자체가 그림이 된 것이다. 그림의 정의는 평면에 선과 색으로 형상을 그리는 조형미술이다. 그 정의를 뛰어넘은 것이다.

  

작가는 1993년 초 창조한 액체화2016년 창조한 해프닝 물감층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고민하다 숱한 시련 끝에 우주 연속 해프닝 회화론을 정립했다. 책으로 세 권 분량이다. 작가는 이 이론 정립을 또 하나의 기적, 두 번째 기적이라고 부른다.

 

 

▲ 1993년 초 ‘액체화’ 탄생 작

    acrylic on canvas-cloth 113x124㎝  © 화성신문


  

그림이 저절로 되다

 

인터뷰는 11시간동안 계속됐다. 오전 10시에 서울 작업실에서 만나 점심 때 냉면 한 그릇 먹고 밤 9시에 끝났다. 인터뷰는 끝날 듯 끝날 듯 계속 이어졌다. 핵심 개념 몇 가지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기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작가는 순수함을 추구했다. 순수한 느낌을 주는 작가가 그래서 더 순수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표정이 밝고 목소리도 맑고 컸다. 잘 웃었다. 나이든 신명나는 소년이었다.

 

박 작가는 1957년생 닭띠다. 주민등록상은 1958년 개띠다. 화성군 태안면 병점2(지금의 화성시 병점동)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점)’이라고 불렸다. 항아리를 만드는 곳이었다. 흙이 빨갰다. 비가 오면 땅이 질어 발이 묶였다. 작가는 상당히 예술적인 곳이라고 표현했다.

 

전쟁터에 모두 밭이 됐어요. 아홉 집만 파괴되지 않았어요. 공소라고 있었어요. 천주교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병점 일대 주민들이 모두 모였어요. 공소 초대 회장이 저희 할아버지예요. 집안이 4대째 천주교예요. 묵주 신공이 저의 그림과 직결돼요. 저의 그림은 하나님과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그림이기 때문이죠.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신기해요. 하하.”

 

작가의 어린 시절 삶은 기구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 살 때 어머니가 가출했다. 작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불안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유를 거기서 찾았다. 작가는 병점초등학교와 수원중학교, 서울 숭문고등학교를 나왔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이 너무 쉬웠어요. 타고난 것 같아요. 대여섯 살 무렵부터 그림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신동이라고 그러잖아요. 뭔가를 그리려고 하면 저절로 그려지는 거예요. 너무 똑같이 그려져요. 아저씨들이 어어, 얘 봐~’ 그랬어요. 동네 아줌마들이 수다를 떨면 그 얘기가 그대로 생중계처럼 허공에 그림으로 보이는 거예요. 손을 밑에서 위로 그리든, 뒤에서 앞으로 그리든, 손이 저절로 그려져요. 장면이 한 면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지원했다. 서울대는 떨어지고 홍익대 2지망으로 낸 미술교육과도 예비 3번이었다. 입시미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홍익대에 78학번으로 입학했다. 입학하면서부터 학비를 마련하느라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2학년 마치고 군대 다녀오니 서양화과와 미술교육과가 서양화과로 통합돼 있었다. 3학년에 복학할 때 어머니가 수업료 50만 원을 대주었다.

 

아르바이트 안 해도 되잖아요. 공부하고 그림만 그렸죠. 100명 중에서 장학금 받은 학생은 남자 중에 저밖에 없었어요. 여자는 대여섯 명이 받았어요. 성적은 올 A였어요. 그 다음 학기에도 올 A. 처음에 무시하던 사람들이 아무 소리 안 하더라고. 인정을 하는 거예요. 4학년 때 동아미전에 출품했어요. ‘예언라는 작품이었는데 입선했어요. 롤러를 활용한 다양한 바리에이션(variation)으로 그린 작품이죠. 하지만 상의 비 순수성을 알게 됐어요. 그 일 이후 다시는 공모전에 작품을 내지 않았어요. 순수를 잃는다는 말은 나더러 장사하라는 거지요. 만약 제가 판사가 됐다, 장관이 됐다, 그러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예요. 제가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예요.”

 

복학 후 1984년도에 홍익대 축제 때 열린 10달리기 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 1등한 사진은 졸업앨범에도 크게 실렸다. 이듬해 잠실에서 열린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해 42.1954시간 만에 완주했다. 유학 전 스스로의 체력 검증에서 합격한 것이다.

 

 

▲ 1983년 홍익대 교내 미전 출품작

     구조(Structure) oil on canvas 91x116.5㎝  © 화성신문

 

 

그림 그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작가는 1985년도에 홍익대 졸업 후 동기들 중 실력 있는 친구 몇 명과 커브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전시회도 두 번 열었다. 고등학교 세 곳에서 미술교사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작가는 입시화실을 차렸다.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고,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작가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1988년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목표는 서양화과 세계 1위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 입학이었다.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돈을 엄청 벌 수가 있었어요. 만약 미국에 가지 않고 돈을 벌고, 번 돈을 굴렸다면 여기서 저기까지 땅을 샀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은 땅을 치고 울고 있을 거예요. 나는 내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요, 자기 재능을. 저의 재능은 끝이 없는 거예요. 피카소든 뭐든, 심지어 백남준 선생까지도 올려다 보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건방진 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니까요. 나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나만의 세상을 펼칠 수 있으니까요.”

 

미국 도착 후, 영어를 배우기 위해 트루먼 칼리지에 다니며 하루에 단어 1000개씩 외워가며 영어를 공부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토플 500점을 넘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섯 차례 시험 끝에 527점을 받았다.

 

1989년도에 대학원 첫 도전을 했다. 포트폴리오 심사에서 떨어졌다. 세 곳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가고 싶은 대학원에는 떨어지고 프랫(pratt) 인스티튜트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는 붙었다. 서울대는 떨어지고 연세대와 고려대는 붙은 격이었다. 고민 끝에 1990년도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 어드밴스트 페인팅 클래스(Advanced Painting Class)에 들어갔다.

 

대학 수준은 넘었고 대학원은 수준이 안 되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어드밴스트 페인팅 클래스에서 실력을 더 쌓으면 대학원에 붙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죽을 정도로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이 그림 그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걸 경험했어요. 1년 반 정도 했어요. 하루 종일 진이 빠지도록 그렸어요. 남들 평생해도 못 그릴 그림을 그렸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어요. 지도교수인 미치코 이타타니 교수님이 제 작품을 보시고는 축하한다. 너는 너의 새장에서 나왔구나하시더군요.”

 

작가는 1991년도 가을학기에 대학원에 재도전했다. 어드밴스트 과정에서 그린 20개 작품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다. 합격했다. 전 세계에서 500명이 지원했는데 그 중에서 8명 안에 든 것이다. 7명이 백인이었고, 한 명이 아시아인인 자신이었다.

 

아침 7시부터 밤 7시까지 계속 그림 속으로 파고들었어요. 창작이라는 건 죽을 정도로 힘들어요. 정말로 죽을 각오로 해야 해요. 뭔가를 해결해야 해요. 자신의 지성과 재능과 체력을 다 쏟아 부어서 뭔가 새로운 거 하나를 찾아내야 돼요. 세상에 없는 뭔가 새로운 거, 누구도 하지 않은 걸 찾아야 해요. 진실해야 합니다. 모방은 안돼요. 저녁에 하숙집에 가잖아요. 바퀴벌레 나오는 월세 제일 싼 집이에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요.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해요. ‘주님,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잖아요. 제가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 옛날 생각하며 이야기하니까 눈물 나려고 하네요. 하하.”

 

졸업작품전을 한 달 반쯤 앞두고 있을 무렵, 작가는 그동안 사유해온 모든 조형 작업 과정이 연결된 총체적 형상성을 이룬 상태였다. 작가는 그림에 음양 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힘을 짜내 그 그림을 부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과 우주를 극한까지 그려냈음에도 무언가 영적으로 낯섦이 느껴졌다.

 

 

▲ 1993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전시  © 화성신문

 

 

기적, ‘해프닝으로 찾아오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는 운명적인 그날, 액체화를 탄생시킨 그날을 맞았다. 작가는 1993년 초 그날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날도 패닉 상태로 오른손으로 묵주 신공을 바치며, 작은 졸업 전시작 하나를 더 시작하려고 첫 붓질로 화면을 열어 놓고 바닥에 놓인 캔버스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태까지 해온 그림이 세계적인 창조는 아니라는 비애감이 일어나며 나도 모르게 왼손으로 물바가지를 화면에 확 둘러엎었어요. 순간적인 일이었어요. 그런데 화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캔버스의 균형을 잡아놓았어요. 그림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혼자 실없이 웃었어요. 그리고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지요. 다음날 그림이 말라 있었고, 나는 이 그림을 벽에 기대어 놓았어요. 그때 시카고 아트 최고 교수님인 수잔 도레모스 지도교수께서 들어오시더니 비명을 지르셨어요. Oh, my god!”

 

작가가 첫 기적이라고 말한 액체화의 탄생 순간이었다. 졸업작품전에 내놓을 작품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추상 페인팅에 해프닝이 일어나 화산 같은 이미지로 통합된, 평면에서는 계획조차 할 수 없는 작품이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에도 지도교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Oh, my god!”, “That’s it!”이라고 말했다.

 

액체화가 미술 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옵아트, 미니멀아트, 개념미술로 이어지던 모더니즘의 발전 과정에서, 모두 한계에 부딪쳤다고 생각한 개념미술의 한계를 일체의 표현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평면 연속 해프닝으로 유일하게 깼기 때문이다. ‘창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창작은 개인기로 끝납니다. 하지만 창조는 미술사를 깨는 탄생작이 있고 전세계에 퍼져 문화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1993년 초 제 액체화 탄생작은 첫 국산 창조화인 것입니다.”

 

작가는 6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1993년도에 귀국했다. 이듬해 63갤러리에서 귀국전을 열었다. 1995년도에는 삼성이 설립한 미술 특수대학 사디(SADI)의 초창기 설립 교수가 됐다. 쟁쟁한 도전자 200명 중 8명에 뽑혀 3년간 정교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 2016년 그녀의 해(her sun) 聖水, acrylic 37×32㎝

액체화를 발전시킨 ‘해프닝 물감층화’. 이 그림은 회화적 차원에서 성수(聖水)를 탄 액체 물감 구사의 자유자재성과 ‘우주 연속 해프닝 회화론’에 의해 생사시공을 타파한 ‘우주 전체 라이브 그림’이 된다. © 화성신문

 

 

작가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액체화를 발전시킨 해프닝 물감층화를 개발했다. 물감 자체가 그림이 된 것이다. 2013년도에는 작가가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우주 연속 해프닝 회화론을 이론적으로 완성시키며 세상에 선포했다. 2014성환의 영적-실재 그 자체의 세계 우주 최초 창시전을 열었다. 올해 4월에는 화면에 손 대지 않고 발현 중인 그림들로 우주 전체 성령의 사랑화전을 열었다.

 

저는 영적인 사람이에요. 인류의 최고 정체성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저에게 그림은 소명입니다. 성당에서 축성한 성수(聖水)를 사용한 액체화와 해프닝 물감층화는 우주 자체 발현화예요. 액체 충돌 해프닝, 액체 충돌 연속 해프닝을 통해서죠.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죠.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고요. 저에게 미()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서 나옵니다. 죄 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찢기고 뜯기고 꼬이고 엉키고 얻어터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죠.”

 

김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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