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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엄지발가락 유튜버, 이무길 경기도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화성시 지회장]
“장애인은 특별·부족하다는 편견, 유튜브로 바꾸고 싶어”
실패는 다음을 위한 자양분, 성취를 위한 소중한 경험
뇌병변 장애인 당당한 삶에 도움주는 것이 가장 큰 소망
 
서성윤 시민기자 기사입력 :  2021/10/2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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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신문

뇌병변 1급의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있어 화제다. 지난 4월 취임한 이무길 경기도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화성시 지회장을 만나 유튜버가 된 계기와 장애인의 삶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본인 소개와 인사 부탁드린다. 

 

경기도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화성시 지회장을 맡고 있는 봉담읍의 이무길이라고 한다. 어릴 적 고열로 인해 뇌성마비장애를 갖게돼 손을 쓰지 못하고 발을 주로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생활이란 걷는 것은 어렵고 다리만 그나마 조금 움직일 수 있어서 소소한 일상만 가능하다. 나머지는 활동지원사님이 전적으로 일상생활을 도와주고 계신다. 2015년 화성시로 전입한 이후 장애인 권리옹호 활동에 앞장서다가 올해 4월부터 경기도뇌병변인권협회 화성시지회에서 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화성지역 뇌병변장애인 인권증진을 위해 미약하나마 작은 힘을 보태려 노력 중이다. 

 

▲다양한 콘텐츠로 유튜버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유튜버 활동을 시작한 것이 맞다. 처음엔 이름을 ‘이발가락’으로 했는데 좀 평범한 것 같아 ‘엄지발가락TV’로 바꿨다. 제 일상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영상들이다. 피규어, 프라모델, 수채화 등 발로 하는 취미생활을 주로 업로드하고 있다. 이런 활동으로 내가 장애를 가졌다고 특별하거나 부족하지 않겠냐는 편견을 지우고 싶었다. 나도 이런 일상을 누리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이런 유튜브 활동으로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족필화가로서 수채화를 그리고 프라모델로 취미생활을 하고 있고, 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지회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니까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셨다. 준비된 것 없이 카메라 켜고 일상을 담기 시작했다. 용기 하나 가지고 시작했다.

 

 

▲엄지발가락TV에 대해서 좀더 소개해 달라.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도 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요즘은 발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 발로 무엇인가 조립하는 재주와 키덜트 기질이 있는 편이라 그렇다. 프라모델을 발로 조립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방송한다. 만드는 것을 직접 보여주면서 재미있게 보여주려고 연기도 한다. 

 

37명의 다양한 연령대가 제 유튜브를 구독하고 계신다. 처음에는 지인에게 부탁해 구독자가 스무 명을 간신히 넘겼다. 모두 저를 아시는 분들이니까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셨는데, 꾸준히 영상을 올리다 보니까 구독자 분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응원의 댓글 남기시는 분들도 계신다. ‘구독’과 ‘좋아요’는 정말 큰 힘이 된다. 올해 목표는 50명을 채우는 것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엄지발가락TV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주기를 바라는가. 또 여러 이유로 도전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전할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냥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봐주시면 된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손 말고 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제가 틀린 게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살고 있다는 걸 편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마음 속에만 품었던 소망이 있다면, 주저 말고 바로 실행에 옮기셨으면 좋겠다. 저도 장애를 이유로 망설이고 주저한 적이 많았다. 분명 실패할 거라 속단해 시도조차 못했던 일도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됐다. 실패하더라도 다음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실패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시작하면 성취를 위한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지회장님으로 활동하시기 전 학창시절이나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싶다. 

 

뇌병변(뇌성마비)장애로 30여 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손을 쓸 수 없고 불편한 몸으로 집을 나와봐야 집 옆 공원 아니면 주변 한 바퀴 도는 것밖에는 없었다. 특히 80~90년대에는 중증장애인을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 없는 시간을 골라 잠깐 밖에 나가고 들어오길 반복했다. 어느 날 공원에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여학생들이 비아냥거리고 놀리는 바람에 모멸감을 느끼며, 집으로 피하기도 했다. 제가 사춘기 시기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던 사회였다. 이후엔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만 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제겐 트라우마가 됐다.

 

30대 초반에 장애를 가진 목사님이 운영하는 교회에 가게 됐다. 목사님이 저에게 “너는 육체적 노동이 어려우니 머리를 쓰는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 학벌을 취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누나, 형은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목사님이 공부를 할 수 있게 가르쳐 준다고 하셔서 너무 좋았다. 검정고시를 위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공부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3년 만에 합격했다. 고등학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나왔다. 이후 화성동부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자립을 위한 공부와 체험을 하고 장애인권 활동까지 하게 됐다.

 

 

▲장애인 인권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에바다IL센터를 통해 장애인권운동을 알게 됐다.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편견 없이 서로를 도와주며 어울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장애인권운동을 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다. 새벽까지 전철로 경기도 일대를 누볐고, 투쟁하느라 밥도 못 먹을 때도 많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됐다. ‘나의 인권은 어디서 찾지? 나의 권리는 어디서 찾지? 나의 인권도 못 찾고 권리도 못 찾으면서 내가 누구의 인권과 권리를 찾아준다는 말인가?’ 이후 한국복지대학교 장애상담과정을 마치고, 강북례 화성동부IL센터장님의 추천을 통해 경기뇌병변인권협회 화성지회에 들어오게 됐다. 

 

 

▲마지막으로 화성시 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지회장님으로서 포부를 말씀해 달라. 

 

뇌병변장애인을 위한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게끔 조력해주는 것이다. 뇌병변장애인은 몸을 쓰는 게 한계가 있다. 우리는 주로 보치아를 하는데, 예술적 감수성 있는 장애인을 발굴해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뇌병변장애인협회에 대한 비젼은 전문 인력을 키워 자부심,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화성시 뇌병변장애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길 희망한다.

 

서성윤 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ㅎㅎ 21/11/01 [18:55] 수정 삭제  
  멋있어요 ㅎㅎ
ㄱㄱㅅ 21/11/25 [07:18] 수정 삭제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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