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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이태섭 전 화성군수를 만나다
‘농촌은 농촌답게, 도시는 도시답게’가 화성의 정체성
장안면 청사 이전… 실증 통해 화성농업발전 이끌어
청년 농민 양성 앞장·열린 공간으로 센터 발전 모색
 
신호연 기자 기사입력 :  2022/07/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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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신문

 

야목리 청년의 할머니 사랑

 

“유수한 대기업에서 날아오는 러브콜 마다하고, 손자바라기 할머니 곁에서 있는 게 효도라고 생각하니 서울의 부귀영화가 다 필요 없더라. 화성군청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광활한 화성 땅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살피다 보니 토박이 정치인이 됐죠.” 

 

때 이른 라일락이 매혹적인 향기로 5월의 꽃 잔치 행렬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볕 좋은 봄 날, 70대 후반에도 건강한 품위를 유지하는 이태섭 전 화성군수를 만났다. 보통의 정치인들을 만나면 정세와 경제를 첫 인사 쯤에 날카로운 언어를 내놓는 경우가 많았데, 이 전 군수는 달랐다. 매송면 야목리에서 동네 아이들이 축구를 할 정도로 마당 넓은 옛 고향집으로 말문을 여는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현재는 수원에 거주하고 있어 고향은 빈 땅만 남기고 아름드리 나무기둥과 대들보는 한국민속촌에 지어서 보존하고 있다. 이 전 군수가 군 제대하고 취준생이던 1968년, 당시 매송면에 면장이던 아버지와 할머니의 권유로 현재 행궁 주변인 수원 종로에 자리한 화성군청(당시 수원군)에서 공직을 시작하게 됐다. 이태섭 전 군수는 수원군에서 화성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과정을 꼼꼼하게 챙긴 화성 역사의 산 증인으로 화성의 시정을 꿰뚫고 살림살이를 알뜰살뜰 놓치지 않은 따뜻한 군수로 평가 받는다. 

 

 

고향사랑이 만들어 낸 독종 이태섭

 

고향이 변하는 가장 아쉬운 점이 사라지는 갯벌이라고 하는 이태섭 전 군수는 죽은 갯벌이 되어 옛 정서와 운치는 추억 속에 묻어 놓고 꺼내 보는 안타까운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갯벌은 서해안을 대표하는 생업의 터전이고 행복이었다. 고향의 마지막 갯골에서는 당시 백가지 나무 하나만으로 잡아 올린 누룩지(망둥어의 경기화성 안산 김포 방언) 한아름 담긴 양동이에 고스란이 남아 있다. 이 전 군수의 고향사랑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남양방조제에도 독종으로 남아 있다. 폭격의 목표 지점으로 쏘아대던 이 곳은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조업을 금지하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매향리 전모씨라는 젊은 청년이 폭탄이 쏟아지는데도 게를 잡으러 나가는 독종인 터라 화성군의 수장으로서 주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의지로 그를 말리는 일이 여간 어려웠던 게 아니라고 털어 놓는다. 

 

“그가, ‘내가 죽지 당신이 군수가 죽어’하며 갯벌로 들어가는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마음으로 전모씨를 죽기 살기로 말리는 통에 얻은 별명이 독종 이태섭”이라며 

 

생업이었기에 목숨까지 걸고 들어간 젊은이를 말리며 싸우다가 정이 더 많이 들었다는 고향 사랑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몸과 발이 먼저 움직이던 공직 생활

 

이 전 군수가 공무원을 하던 시절에는 요즘 공무원들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 당시는 관내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해야 하는 만능 엔터네이너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모내기를 도와 못 줄을 잡아주며 못 줄 띄우라는 홍보도 도맡아서 해야 했다. 손쉽고 풍성한 수확에 도움이 되는 방범을 지도하면 귀찮게 여기고 기존의 방법을 고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어떤 직원은 가서 고함에 구타까지 당하는 일도 기억난다고 했다. 이태섭 전 군수는 당시 수차례 농부들을 찾아다니며 농사의 발전을 위해 애썼던 일을 생각하면 힘들었어도 보람 된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호미로 모를 내던 땅에 줄 맞추어 기계가 들어가게 하는 발전된 영농의 달라진 풍경은 이 뿐 아니다.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기 위해 수원역에 있는 공장까지 다녔고 전국에 새마을 운동으로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공무원들이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지금의 발전이 이런 옛 공직자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감사함이 느껴졌다. 이 전 군수는 지금도 수원역 육교만 지나가면 그 당시가 생각난다며, 슬레이트 지붕 하나 하는 것도 그랬는데 지금은 그거 없어진지 오래고 건물들도 다 멋지게 지어지고 디자인이 좋은 짐들과 주택혁명을 이룬 아파트를 보며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1960~70년대의 공무원 생활을 하며 현장을 발로 누비고 노동과 주민 밀착형으로 동분서주하며 화성의 발전에 열정을 쏟았던 때가 신나고 재밌던 시절이었다고 하는 거보면 이태섭 전 군수는 화성의 정치 1번지로 될 그릇을 그때부터 다져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 이태섭 전 화성군수가 화성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대관소찰, 넓게 보고 적은 것도 살펴라

 

인생은 동그라미라고 하는 이태섭 전 군수의 소신은 ‘대관소찰’이라고 한다. 넓게 보고 적은 것도 살펴야 한다는 네 글자가 이 전 군수의 사랑과 올곧은 정치인의 모범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서 일까? 이태섭 군수에게 아직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인생을 동그라미로 살아간다는 이유를 모난 곳이 없이 다 접촉이 된다고 해석하는 마음이 결국 넓게 보는 큰마음인 것. 

 

그저 목표는 있으면서도 정처 없는 나그네 길에서처럼 가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술 한 잔 먹고 이야기 나누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스스로 ‘못난이’라고 하는 이에게 어디 한 군데도 겸손이 아닌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글쎄 난 잘 몰라. 그냥 참 부드럽다, 인자하다, 웃는 인상이라고 들 많이 평해 주시는데 고맙지 뭐. 웃어야지 골내면 뭐 해.”

 

한 기관의 최고 수장을 역임한 어르신의 덕목을 고개 숙여 받아 적고 나니 리더의 신뢰가 주는 깨달음이 와 닿는다. 신뢰를 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며, 그러려면 먼저 상대를 믿어야 된다는 일침에 심쿵한다. 믿음은 신중과 정직이라는 방법까지도 챙겨 주는 그의 삶의 반석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풍요가 흐른다. 정치인은 거짓말 시키면 안 되고 주위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쓴소리는 새겨들어야 할 부분으로 각인된다. 삶의 모토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태섭 전 군수에게 살며 생각하는 입장에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한마디를 부탁드렸더니 “나를 믿어라”는 즉답이 돌아온다. 스스로를 믿고 고민을 하며 방법을 찾아가는 젊은이가 되라는 지침은 오랜 동안 그가 살아 온 경험에서 나오는 방법이었으리라.

 

 

정체성을 살리는 도농 복합도시 화성

 

“민심이 변한 건 요즘 어디나 마찬가지고 세상이 자꾸 발전 할수록 인심은 사나워지는 거 아니여. 그래도 화성 사람은 악인이 없고 순진해. 화성시민들이 참 밑바탕은 선량해서 악인이 없다고 봐야지”

 

아직도 화성 시민을 보면 무언가를 계속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부모 같은 마음이 보였다. 화성시는 자원이 풍부해서 원주민은 약 20만이고 외지인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들도 모두 화성의 땅에 살고 있으면 화성시민으로 사랑 받고 혜택을 받아야 한다. 산골마을에서 지금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동탄 신도시 또한 외지인이 많이 살고 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시를 사랑하고 가꾸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이 도농 복합 도시로서 윈윈하며 나아가는 정체성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그가 군수와 의장을 하며 지난 세월을 뒤로 하고 화성시의 바라는 게 있다면 화성의 정체성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화성의 정체성은 ‘농촌은 농촌답게, 도시는 도시답게’ 하는 것이 지역의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다. 도농 복합 도시로써의 화성은 세상 어디에도 이 보다 더 좋은 데가 없다는 고향 사랑의 의지를 드러냈다. 정말 그의 말대로 화성은 그렇다. 험하고 높은 산도 없고 그저 아기자기한 구릉이 아름답게 드리워진 천혜의 땅과 서울의 1.4배나 되는 드넓은 옥토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도시이다. 

 

지금 화성의 정체성이 동탄과 향남은 신도시가 됐고 새솔동과 남양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공장이 많이 들어서는 곳에는 환경도 생각을 해야 되고 개발을 하되, 천연 자원을 이용한 농촌을 살리는 것이 도농복합 도시 화성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귀한 자원을 계획적으로 세워 가야하는데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될 우려는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며 절대 방만하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역시 그는 화성밖에 모르는 화성 사랑쟁이다.

 

 

“행복은, 그저 걱정 없는 거지 뭐”

 

이태섭 전 군수는 2006년 7월 13일 시의원에 당선되었고, 2008년 7월 17일 민선 화성시의회 의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의회를 이끌었다. 그는 수원농고를 졸업하고 1961년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졸업한 최상급 엘리트 인재의 길을 걸어왔다. 성장 과정도 면장님인 아버지와 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으로 자랐기에 요즘 말로 하자면 금수저의 삶이었다. 그에게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지 궁금해 졌다. 이렇게 화려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 온 사람이라면 행복의 조건도 원대할 것 같았는데 듣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소박한 그의 꿈에 고개가 숙여졌다. 행복이라는 질문에 그의 답은 간단라고 명료했다. 

 

“행복은 그저 걱정 없는 게 행복이지 뭐. 행복이 뭐야 근심 걱정 없는 게 행복이지. 아주 간단하잖아 뭐 행복이 무슨 뭐 자식 잘되고 어쩌고 그건 다 필요 없고 그저 마음 편하게 사는 거지.”

 

명예도 부귀도 다 부질 없고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그는 잊지 않는 존재라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느낌과 보람을 갖게 만든다고 했다. 이제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그에게 화성 시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어김없이 “그저 행복하게 사십시오”라고 했다.

 

신호연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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