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도 참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가 동방예의지국의 구성원답지 않게 자극적이고 극단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분열과 갈등은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피로사회를 넘어 위험사회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진영논리에 충실한 정당 간의 갈등, 노사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 그리고 경제적 양극화,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 인구분포의 양극화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갈등과 양극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화합과 평화, 공존의 논리는 절실하건만 그것은 유약한 자들의 백일몽이거나 회색지대의 자기합리화 정도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극단의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중용지도(中庸之道)를 떠올려 본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는 새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들려준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들어있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신앙과 생활 지혜의 결정체인 구약성경 잠언(箴言)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들어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한마디로 말해 양극단을 피하고 중용의 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중용지도는 유학(儒學)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君子)가, 그리고 한국적 군자상인 선비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길이었다. 중용지도의 첫걸음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불편불의不偏不倚] 중심을 잡아 양극단을 거머쥐는 것, 즉 집기양단(執其兩端)하는 것이다. 중(中)이란 글자의 본래 형상은 펄럭이는 깃발이다. 깃발은 바람에 따라 펄럭이며 방향을 바꾸지만 깃대는 굳건하듯 중용에서 말하는 ‘중’은 산술적 중간이나 어중간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깃발이 펄럭일수록 깃대는 더 굳건히 자기 자세를 갖추기 마련이다.
이런 중용은 저울질과 활쏘기에 비유되기도 한다. 저울은 물건의 무게에 따라 즉각적으로 저울추를 움직여 최적의 균형점에 머문다. 그래서 중용을 권도(權道)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권’은 저울의 뜻이다. 중용은 저울의 균형 잡기와도 같은 것이다. ‘저울질’은 신속 정확해야 하듯이 군자는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최고의 적합을 추구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과는 거리가 멀다. 활쏘기에서도 균형감각은 중요하다. 호흡, 자세, 팔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 명중(命中), 적중(的中), 관중(貫中)할 수 있다.
중용지도의 둘째는 소위이행(素位而行)하는 것이다. ‘素’는 ‘~을 바탕으로’, ‘~에 근거하여’의 뜻으로 ‘素位’는 ‘정해진 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위이행이란 ‘정해진 자리에 바로 서 맡은 바 소임(所任)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서려 하거나 자기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지 않는 자세는 중용의 길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중용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메소테스(mesotes)’, 즉 중용에 대해 논한 바 있는데 동양의 중용사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영국인들 역시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신사(紳士), 즉 젠틀맨을 존중했는데, 본래는 지주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계층을 떠나 관용과 아량, 용기와 절제, 약속의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사람, 실천적 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을 신사로 여겼다.
갈수록 중용의 도리에 충실한 교양과 품격을 갖춘 지도자나 사회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돼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 개개인이 명심하고 걸어가야 할 중용의 가르침이 하나 있으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