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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_ 시로 읽는 화성 12]
전쟁의 아픔 속에서 피워낸 소금꽃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6/1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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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민 시인/ 화성작가회의 사무국장     ©화성신문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4주년, 정전 71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이 휴지기에 접어든 1951~53년 사이 서신면 지역에는 피란민이 대거 유입됐다. 대부분 38선이 뚫리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황해도 주민들, 한국전쟁 당시 최고의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 피란민들이었다.

 

1952년 3월부터 정부와 유엔은 화성에서 난민정착사업을 시행했고, 당시 철의 삼각지 피란민들은 주로 매화리에 정착했다. 그들은 미군의 구호물자로 연명하면서 오직 등짐만으로 돌과 흙을 날라 제방을 쌓았다. 포성은 멎었지만, 그들에겐 생존이라는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밀려드는 파도에 맞선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포기를 몰랐다. 그렇게 바다를 밀어내고 남양만에 880m의 제방을 쌓았다. 이후 염전을 만들고 자치공생조합을 결성했다. 여섯 명이 소금창고 하나를 소유하고 공평하게 소금판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공생염전의 시작이었다. 

 

바람 불어 풀씨가 경계를 넘어간다

 

다른 풀이 되기까지 절박한 삶이었다

 

매화리 소금개미는

 

빈 구름만 먹었다

 

아버지 접시꽃은 흰 애벌레로 가득하다

 

기억 속 마지막처럼 뭉개진 자줏빛 하늘

 

저녁 달 궤도를 딛고

 

깽깽이풀 자란다

 

풍경이 저물어가는 염전의 끝에서

 

끝없는 이야기는 희미해져 가는데

 

입 없는 소금개미들이

 

흰 애벌레를 굽고 있다

 

- 배경희, 「매화리 염전」 전문

 

 

그들에게 염전은 절망 끝에 붙잡은 동아줄이었지만 실향민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다른 풀이 되기까지 절박한 삶이었다”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으로 최소한의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지만 신산한 삶의 무게는 쉬이 벗어지지 않았다. 피란 당시에도 매화리는 화성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농지가 적었다. 피란민들 사이에서 ‘피란 보따리를 잘못 풀었다’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난해 화성작가회의는 화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실향민들의 삶을 문학으로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필자는 이 시를 쓴 배경희 시인, 화성작가회의 회장인 김명철 시인, 표문순 시인과 함께 매화리를 방문했었다. 실향민 2세대 어른들을 만나 뵙고 공생염전도 돌아보았다. 그날 염전 너머 길게 이어진 제방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에겐 간절한 희망이었을 소금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았다. 매화리의 염전이 전쟁이 남긴 물리적 유산이라면, 공멸(共滅)이 아닌 공생(共生)의 가치는 후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정신적 유산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입 없는 소금개미들”이 되어야 했지만, 끝까지 ‘공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실향민 1세대들의 삶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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