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화성문인협회 사무국장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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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년)
마치 목판화 속에 파고들어 간 듯 꺼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무겁다. 햇살조차 비켜 갔을 그 방은 저녁 그림자도 들지 않을 것 같다. 시든 해처럼 팔리지 않는 열무를 이고도 오지 않는 엄마, 일부러 천천히 숙제를 하는 아이는 윗목에 나뒹구는 찬밥 덩어리가 되어 처절하게 외롭고 무서운 시간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시 ‘바람의 집’에서 엄마는 아들을 무릎에 뉘고 “무서운 바람의 문풍지 소리는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라며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아이의 배를 쓸어내린다. 차라리 그 장면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건 엄마에 대한 회상과 간절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 걱정’은 그의 유작 시집 맨 마지막에 실려 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엄마는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시인의 마지막 모습처럼 우리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외롭고도 무서운 냉골 방에 갇혀 있는 자신을 아무도 꺼내주지 않았던 유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던 춥고 배고팠던 그 가난한 시절을 우리는 왜 그리워하는가.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자나 깨나 내 걱정뿐인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겨울 문풍지 같은 ‘엄마’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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