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민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 교수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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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언론사를 유지하고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성신문’ 창간 20주년은 경기도 화성뿐만 아니라, 지역 언론의 역사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성취를 기리며, 지역 언론의 역할과 민주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어 두고자 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현대의 정치철학자 다수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선거와 같은 대의제로 한정하여 파악하는 것의 위험을 토로해 왔다. 가령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대의제와 민주주의는 오히려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란 모두의 능력이 평등하다는 전제로부터 성립하지만, 대의제라는 참여 이벤트는 소수인 엘리트 계층과 다수인 대중 간의 분할 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보통선거와 정치의 직업화로 대표되는 대의제 아래에서 정치 권력은 이미 주어진 우월성(나이, 재산, 가문, 지식 등)의 연장일 뿐이다. 이에 맞서 민주주의는 어떤 것에도 토대를 두지 않고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는 힘으로부터 발생한다. 민주주의와 정치의 근본 개념을 일반적인 권력 행사와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선거제도를 통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대의되거나 대표될 수 없는 자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모든 정치철학은 바로 그 대의/대표될 수 없는 (비)존재의 자리를 끊임없이 사유해 왔다. 위에서 예로 든 랑시에르는 이를 “몫이 없는 자들의 몫”으로 정의한 바 있으며, 조르조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알랭 바디우는 “사건의 자리”로 명명한 바 있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법적으론 죽은 상태”를 의미한다. 분명 살아 있음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지하는 아무런 법적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
또한 “현시하지만 재현되지 않는 장소”를 “사건의 자리”로 명명하면서, 존재함에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전혀 다뤄지지 않는 공백과도 같은 (일종의)심연을 사유토록 인도해 왔다.
인간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가 사실상 거부된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과 의지로부터 민주주의의 출현을 사고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몫이 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아무나”의 권력과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질서를 의미하기보다는 소란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질서란 가치를 독점하고 역할을 배분하는 지배의 형태라면 소란이란 몫이 없는 자들이 몫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주노동자나 난민,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보라. 이처럼 민주주의란 정부 형태나 사회 체제가 아니며, 반대로 그러한 체제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되어있는 자들의 해방적 힘을 의미한다. 형식적인 권리의 평등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사회적 삶에서의 실질적 불평등을 사유해야 한다.
어쩌면 지역 언론의 역할도 여기 있지 않을까 한다.
지역 언론은 지역사회의 정치·경제적, 문화적 현황과 성취, 한계 등을 널리 알리고 소개·비평하는 것은 물론, 지역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과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성취가 더욱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사회적으로 현존함에도 전혀 말해지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가령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를 살펴보자. 희생자 대부분은 사내 하청 일용직 파견 노동자였다. 이들은 중국과 라오스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이기도 했다. 경기도 화성의 산업과 노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삶과 실태에 대해 지역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조명해왔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미리 상쇄할 여지가 확보됐다면, 이런 참사를 방지하는 데 조금은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지역 언론은 때론 그 어떤 지방정부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창간 20주년이라는 무거운 역사를 갖게 된 ‘화성신문’이 앞으로도 민주주의 실현의 장(field)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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