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화성문인협회 사무국장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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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 오신다 철길 가에 맨드라미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집서 떡 한 점 떼어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베어먹었다 내 살은 병점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 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 오산, 정남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1994 민음사)
시인은 병점 사람이다. ‘병점’ 속에 나열된 시적 배경들은 1960년대 후반의 병점의 모습 그대로다. 시인의 어린 유년기의 생생한 기억을 말간 수채화로 그려 놓은 그림일기 같다. 흐릿해서 차라리 손에 잡히고야 만다. 시를 읽은 후에도 한참을 빠져나올 수 없다.
그림 속에 맨드라미가 흔들리고 있다. 어린 최정례가 오래도록 담벼락 아래 앉아 있다. 자주 철도원 아버지를 기다렸을 것이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목이 꺾이는 풀꽃들, 먼지처럼 흩날리는 홀씨들이 병점역 사거리 떡집까지 날아간다. 거기서 떡 한 점 떼어먹는 어머니가 있었을까. 시간은 떡집이 사라진 속도로 흘렀다. 엄니는 죽고 도시로 가는 길 하나둘 생겨나고 시인은 기차를 타고 먼 도시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 이후 어린 소녀 최정례는 보란 듯이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이 한 편의 시가 증거하고 있다. 시인의 거룩한 기록인 가족사가 고스란한 족보로 남아 한순간도 병점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병점은 시인의 ‘살점’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시인은 지병으로 2021년 6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에 실린 ‘벙깍 호수’에 10년 후의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라도 하듯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시인이 타계한 후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독자들로부터 자주 회자되고 있다.
“오늘 작가회의로부터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시인 최정례 부음 목동병원 영안실 203호 발인 30일. 평소에도 늘 받아보던 문자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었고 내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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