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돌과 친해지고 있다. 수석(壽石)을 수집한다는 게 아니다. 내가 친해지고 있는 돌은 그냥 돌이다. 크든 작든, 길가나 시냇가에 있는 돌. 산기슭이나 산 정상에 있는 하찮은 돌들. 그러니까 나의 돌은 지극히 물리적이지만 또한 그래서 지극히 관념적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유물(唯物)의 극한이 곧 유신(唯神)이듯.
얼마 전에 달만한 크기의 운석이 아프리카에 떨어졌다는 소란이 있었다. 운석의 값어치가 금값의 열 배는 된다는 말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샀다. 운석이 그렇게 비싼 것은 태양계나 우주의 기원을 알아낼 수 있다는 단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란다. 나도 근래 몇 년째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몹시 궁금해 하고 있다. 운석을 통해 그 비밀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어쩌면 나까지도 팔아, 운석을 살 것이다.
사실 나와 돌의 특별한 인연은 50년도 넘었다. 내가 세 살인가 네 살 때였다고 한다. 늦은 여름, 햇볕이 짱짱한 작은 시냇가, 늘어져 있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그 그늘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엄마, 그 엄마 곁 모래사장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의 발치에 보이던 바둑알보다 작은 점박이 조약돌.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 되자 엄마는 내가 그 조약돌을 삼켰다고 말해 주었다. 엄마는 조약돌이 목에 걸려 버둥거리고 있는 나의 등을 수차례 두들겼으나 조약돌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내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의 말은 내가 삼킨 것이 조약돌이 아니라 새알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돌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사실 그대로 하는 말하지만, “그게 돌이 아니라 새알이었나?”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말이지 내 겨드랑이에서 뭔가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가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혹시 알로 바뀐 돌의 부화?
사람들은 무생물과 생물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또 사람들은 사람과 사물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 사실 사람들은 돌의 뜻을 헤아리기를 꺼려한다. 사람들은 바위틈에서 자라 바위를 쪼개고야 마는 소나무의 뿌리를 보고, 바위의 뜻을 알아내려고 하기보다는 소나무의 생명력에 찬탄을 보내고는 한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차는 아이를 보면 그 아이에 대해서만 말을 주고받는다. 오버까지 해서, ‘아, 저 녀석 대단히 진취적인 성격이야.’ 돌은 늘 뒷전인 것이다. 돌하르방이나 장군석의 뭉개진 코를 보고 여인의 소망에만 손을 들어주지 않는가. 돌은 안중에도 없고.
지구에 떨어지는 운석들은 덩치가 큰 녀석들이다. 작은 녀석들은 돌이 아니라 완전히 산화되거나 먼지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먼지가 된 돌 같은 무기물질이 나의 기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에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지니고 있던 유전자의 80%가 현 인류에게 유전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이 전해졌다. 몇몇 생명체 기원설 중 하나에 따르면 그 생명체는 무기물질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난 먼지의 후예일 수도 있는 셈이다. 내가 삼킨 조약돌의 경우를 보면, 돌은 변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돌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돌은 마침내 지구의 중력을 깨뜨리고 우주로 날아오를 만큼, 어쩌면 깨지고 쪼개지고 닳고 닳아서 한없이 작아지고 싶어 할 것도 같다.
나는 요즘 사실적 상상하기에 빠져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열심히 연습하면 나도, 내 속에 든 조약돌도, 가뿐하게 날아오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