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현 시인, 시낭송가, 화성문인협회 사무국장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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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자명한 산책> 2003년 문학과 지성사
왜 하필 강인가? 강이 ‘나’처럼 그리 만만한가? 강은 은유를 모른다. 비유도 모른다. 강은 1차원으로 흐른다. 그러나 강은 이미지나 상징으로 흐른다. 몇 차원인지 모를 복잡한 ‘당신’과 ‘나’의 어깃장을 결국 강에서 결판을 짓자고 덤벼든다.
시인은 ‘당신’을 빌려 와 강으로 ‘나’의 등을 떠밀고 있다. 정작 ‘나’는 강에 가서 말할 용기가 없다. 어쩌면 다 받아주는 강가에서는 은유나 비유 따윈 생략해도 좋다. 내 지금의 처참함에 대해, 벌레나 나방의 복장이나 애간장이나 몰골 같은 현실을 강은 따지지도 묻지도 발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정작 ‘당신’이 필요하다. 아니, ‘당신’을 사용한다. ‘나’를 빠져나간 ‘당신’은 결국 다시 ‘나’로 돌아오겠지만 강에 가서 말한 당신은 ‘우리’라는 관계성을 보기 좋게 확보하며 ‘나’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강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의 끝은 어느덧 산과 하늘을 향한다. 강의 물길은 오직 하나의 질문과 대답으로 바다에 다다른다. 강은 바다보다 능동적이다. 그리고 바다에 닿기 전 최종적으로 돌려보낼 것들을 걸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강에 가서 몽돌 하나라도 주워 오려고 애쓴다.
가장 지혜로운 ‘강의 사용법’은 무심으로 강가에 가서 ‘당신’과 ‘나’, 서로 눈도 마주치지 마라. 말도 섞지 마라. 침도 튀기지 마라. 강물이 흐르는 것, 흐른다는 그 사실만 확인하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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