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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 애국정신 널리 알려”
주민 자긍심 발로 및 학습공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유범수 기자 기사입력 :  2013/02/2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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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국 23인 상징 조형물.
1919년 3월1일 향남읍 제암리 주민들은 일본 주재소를 공격하고 순사를 처단하는 등 공격적이고 과감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전 민족이 일어나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삼일절을 맞아 향남읍에 위치한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찾았다.

애국정신 기리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지역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바르게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기념관은 현재 지역주민들의 자긍심 발로와 역사 현장 학습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이곳은 제암리 사건뿐만 아니라 당시의 3.1운동 정신과 수원·화성지역 주민들의 독립 만세운동 참여 상황을 널리 알림으로써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넋을 숭앙한다. 또 사적지·관광지로서의 위상을 높이며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있다.
   
▲ 순국기념탑과 공원.


일제 보복의 상처
제암리 사건은 발안 장날시위 등 수원․화성지역 주민들의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응징으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의 결정판이었다. 수원․화성 일대의 시위가 폭동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자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이들 지역에 파견했다. 검거반은 1919년 4월 2~6일, 9~16일 2차에 걸쳐 이들 지역을 돌며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암리 사건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수촌리 사건이 일어났다.

도화선, 수촌리 사건
수촌리 사건은 4월 2일 장안면과 우정읍 주민들이 합세해 벌인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가 그 도화선이 됐다.

4월 3일 오전 장안면 수촌리와 석포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을 파괴했다. 그리고 우정읍 주곡리 일대의 시위대와 쌍봉산에서 합류해 집회를 가진 뒤 우정읍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 2천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총을 쏘며 맞서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뒤 주재소 건물을 방화했다.
   
▲ 순국기념관 입구 앞에 설치된 삼일운동독립기념비.


면사무소가 파괴된 것은 물론 주재소가 불에 타고 일본인 순사까지 살해를 당하자,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고, 그곳의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4월 5일 새벽 3시반경에 수촌리를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검거반은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됐다. 검거반은 4월 11일에도 수촌리를 비롯한 장안면, 우정읍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했다. 이렇게 두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검거작전은 이 지역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응징의 성격이 짙었으며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 23인 순국 합동묘지.
기념관 터에서 23인 순국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제가 자행한 보복학살의 도화선이 됐다. 3월 30일,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했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됐다. 지금 기념관이 있는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아울러 일본군은 제암리 학살 후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추가로 총살했다.

‘끌수 없는 불꽃’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 현장을 확인하러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했으며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기념관 안에 위치한 전시관. 전시관은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1전시관은 제암리 사건과 관련된 목격자 진술 및 유적들로 꾸며졌으며, 2전시관은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자주 독립정신 전파
제암리 사건은 대내적으로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를 근본적으로 파탄시켜 식민지 지배정책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식민통치에 의한 우리민족의 고통과 잔혹한 실상을 폭로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과 자주 독립정신을 전세계에 널리 전파했다.

이 지역의 3.1운동의 가장 큰 특성은 만세시위가 처음부터 혁명적 성격을 띠고 전개됐다는 점이다. 예컨대 식민통치 하부기관인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소를 파괴·방화하고 일본경찰을 처단하며 일본인 상점까지를 파괴하고 있는 사실은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혁명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만세시위를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같이 조직해 전개하고 있는 사실이 보이는데, 이것은 민족적 동질감과 향토애가 종교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있는 증거이며, 무엇보다도 이 지역주민의 인간적 유대가 남달랐음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3.1운동에서 표출된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이 갖는 혁명적 성격의 전통과 지역민들의 인간적 유대는 이후 이 지역에서 출현한 항일 민족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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