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땅이름의 뿌리와 지명유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연재] 땅이름의 뿌리와 지명유래<62>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정찬모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6/03/30 [09:46]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부처내 <1>

 

옛날 향남읍 수직리 동네에는 조마전이라고 하는 상당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관계로 어릴 적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원래 이익에 밝은 그는 모은 돈을 기반으로 해서 전답과 저택은 물론 하인까지 두는 거부(巨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은 물론 남들한테도 도와주는 일이 없어 동네사람들은 구두쇠 영감으로 불렀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조마전도 어느덧 늙고 말았다. 조마전은 나이가 먹을수록 재산에 대한 욕심이 더해 누구 하나도 보태 주거나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고생 끝에 장만한 재산이라 해 움켜만 쥐고 살았다. 그뿐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찾아가면 문전박대가 일쑤였고, 거지가 가면 몽둥이로 몰아냈다. 그리고 가난하거나 게으른 사람에겐 남의 것을 거저 바라는 사람은 굶어 죽어도 싸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님 한 분이 대문 앞에 서서 시주(施主)를 해 달라고 목탁을 치고 있었다. 구두쇠 영감은 시주는커녕, 아무것도 없으니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동양 전에 쏙박 먼저 깨트린다’라는 속담처럼 그는 스님을 몰아붙이면서 어서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스님은 의연한 태도로 계속해서 목탁만 두들기고 있었다.

 

구두쇠 영감은 “나는 부처고 뭐고 나만 믿고 살아 온 사람인데 아무것도 안 믿어도 더 잘 살테니 걱정 말고 썩 물러가시오. 염불이 밥 먹여 준답디까?” 하고 화를 벌컥 냈다.

 

그러자 스님은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을 섬기시오. 나무관세음보살.”하면서 인자한 얼굴로 영감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나 구두쇠 영감은 스님의 말은 들으려고도 않고 마당 끝에 있는 ‘쇠매듭’자리에 있는 쇠똥을 긁어다 스님 바랑에 억지로 넣어 주면서 “내가 줄 것은 이것 밖에 없으니 어서 가지고 가라”고 하며 등을 밀면서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구두쇠 영감집 대문만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이때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깜작 놀라며 뛰어가서 스님을 붙잡았다. 며느리는 스님 바랑에 든 쇠똥을 털고 바랑을 깨끗이 씻은 다음  “스님 제 시아버님이 큰 죄를 지었으니, 중생을 다스리시는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면서 스님을 잠시 기다리도록 해 놓고 급히 안에 들어가서 쌀을 가지고 나와 스님의 바랑에 수북이 담아주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허리를 굽혔다. 며느리도 함께 답례를 했다. 잠시 후 스님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부인의 착한 마음씨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선 아무 말씀 마시고 제가 이르는 대로 하십시오. 사흘 후 날씨가 갑자기 흐리고 천둥 번개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영감님의 지나친 욕심과 고약한 마음씨를 하늘이 징계(懲戒)하고자 하는 것이오니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멀리 피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만일 돌아보면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은 그 자리에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며느리는 정신 차려 생각해 보니 이는 반드시 무슨 변괴가 있을 징조이며 부처님의 자비로운 계시가 아닌가하고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며느리는 집안으로 들어가 시아버지한테 스님과 있었던 전후 사실을 낱낱이 말하고, 앞으로 우리 집에 재앙이 닥칠 징조가 틀림없을 듯 하오니, 지금이라도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재산은 불쌍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자하며, 이후부터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간청을 해도 벽창호 같은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리고 맑은 하늘에 구름이 돌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또 다시 스님의 말대로 일단 이곳을 피하자고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시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어떻게 이 집과 재산을 모은 것인데 모두 버리고 떠난단 말이냐. 그까짓 중의 말을 듣고 그러느냐. 난 죽어도 안 떠나고 여기서 죽겠으니, 너나 떠나거라”했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나서 급히 뛰어갈 때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다. 천둥번개가 세상을 뒤흔들고, 금방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계속 뛰어갔다.

 

이때 구두쇠 영감은 한시라도 자기의 재물을 못 잊어 곡식과 재물을 쌓아 둔 창고로 달려가서 창고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천둥번개가 매우 몰아치더니 번쩍하는 번개와 함께 쾅하고 구두쇠 영감네 집 한복판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 순간 집 창고 할 것 없이 불바다가 되고 말았으니 여기에 휩쓸린 영감인들 어찌 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던 며느리는 매우치는 천둥번개 속에서 집일이 걱정 되었으나 스님의 어떤 일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말라던 말이 머리 속에 스쳐 그대로 뛰어갔다. 그러나 ‘쾅 ‘하는 소리에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웅장하던 기와집이 삽시간에 활활 불길이 휩싸인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한 순간 또 다시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니 며느리도 쓰러져 집안 식구들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착했던 며느리도 죽게 되었는데, 며느리가 죽으면서 그 자리에 ’부처‘로 화신케 됐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수직리 앞 논뚝에는 불상이 서 있으며 액운을 물리치고 소원을 비는 아낙네들의 고사가 더러 이 불상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옛날부터 수직리 사람들은 칠월칠석날 뒷산 당집에서 소머리를 통째로 바치고 제주를 뽑아 고사를 지내며, 마을 사람들끼리 추렴해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수직리 앞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잇고 아래로더가면 황구지천이 있는데 이곳 일대를 가르켜 ‘부처’가 있고 ‘내(川)’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부처내’라 불러오게 된 것이라 하고 있다.

 

출처: 화성시사편찬위원회 발행 ‘충효·예의 고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