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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2] 반 고흐에게 인문학을 묻다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7/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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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고흐는 1872년 8월부터 동생 테오를 비롯해 관련 작가들과 죽기 전까지 902통의 서신을 왕래했다. 고흐는 독서광이었으며 영어원문서적과 불어원문서적을 읽고 감동할 만큼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독일어도 할 줄 알았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러시아, 독일 등의 세계적인 문호의 작품들을 섭렵한 인문의 달인이었다. 외국어를 마스터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엄청난 무기이다. 

 

‘구필화랑’ 런던 지점에 근무할 당시 하숙을 했고 고흐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하숙집 딸 ‘우루슬라’를 짝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고흐가 전혀 딴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집요하고 집착하는 고흐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결국 증오로 변했고, 고흐에게 돌아온 것은 좌절과 절망, 굴욕뿐이었다. 이 일은 고흐의 단단한 엘리트 의식의 껍질을 깨고 생생한 고흐의 알 몸뚱이를 끄집어 냈다. 

 

짝사랑의 실패로 상심하던 고흐는 1876년 화랑 운영 방식이 본인과 도덕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판단, ‘예술작품 거래는 조직적인 도둑질’이라 비판했고 이 때문에 화랑에서 해고된다. 이후 영국의 변두리 학교 교사로 프랑스어와 수학을 가르치지만 가난한 아이들의 수업료를 재촉할 수 없었던 고흐는 3개월 만에 해고당했다. 무차별적인 산업혁명으로 인한 램스게이트 아이들의 빈곤과 고통을 보며 무수한 불행과 가혹한 운명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가족들의 지원 아래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신학대학 문턱에서 라틴어, 대수 및 기하 등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포기했고, 그의 눈에 신학대학은 인간을 구원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기독교의 권위만 가득한 허구의 성처럼 보였다. 1878년 12월 벨기에 남부 탄광촌 보리나주의 가난한 광부들에게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이듬해 50프랑을 받는 임시 전도사 일을 맡게 된다. 고흐가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같이 생활하는 등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자 장로 위원회는 그것이 교회의 권위와 위엄(품위)을 유지해야 할 전도사의 본연의 자세가 아니라며 결국 고흐를 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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