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인문학 강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연재13] 반 고흐에게 인문학을 묻다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7/31 [09:2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한영수 세로토닌 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화성신문

화가로서 소명을 깨닫다. 

 

광부들과 지내는 동안 광부들과 그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데생하면서 자신에게 화가의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고흐의 깨달음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노동이란 신이 주신 재료인 화가의 재능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며 그 작품 속에 신과 인간의 숭고한 무엇인가를 그려 넣는 것’이라 표현되어 있다. 그 후 데생 공부에 전념했고, 화랑에 취직한 동생 테오에게 밀레의 작품을 보내달라 해서 그것을 모사하기 시작했다. 밀레는 농부를 비롯한 소외계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유명한 작가였다. 반 고흐는 밀레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1880년 10월 27세 자신의 생애를 그림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탄광촌 보리나주를 떠나 화가가 되기 위하여 고향인 에텐집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아이딸린 이혼녀였던 사촌 ‘케이’를 짝사랑하다 가족과 친척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또 한번의 사랑의 상처를 경험한다. 다시 헤이그로 전전한 그는 1881년 11월 마침내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차렸다. 당시 그의 한 달에 100프랑 버는 것을 목표삼고 그것으로 빵과 커피로 된 하루 세끼 식대와 하숙비로 50프랑, 화구 및 모델료로 50프랑을 지불할 계획이었다. 고흐는 물감과 화구를 구입하기 위해 돌빵만 먹으며 식비를 아끼는 바람에 위장과 시력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해졌다. 그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버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생활비는 동생 ‘테오’에게 받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 

 

고흐는 1881년 헤이그에서 시엔(크리스틴)이란 여인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그녀는 5살된 딸이 있었고 임신까지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팔아야했다. 게다가 출산이 다가오니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녀에게 반 고흐는 같이 살기를 제안했고 숙식비로 모델을 서달라고 했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으며 동생 테오마저도 말렸지만 반 고흐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딸과 어머니까지 돌봐주었다. 그들의 만남은 계급의 장벽과 의도적인 속셈과 신분차별을 모두 떨쳐 버린 발가벗은 두 영혼의 만남이었다. 그의 명작 중 하나인 ‘슬픔’은 시엔의 상징인 비탄을 테마로 그린 것이다.

 

1883년 고흐는 시엔과 헤어지고 만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와 시엔이 다시 매춘부의 길로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흐는 한때나마 가정의 안락함을 느끼게 했던 시엔과 그의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시엔과 헤어진 후 부모님 밑에서 기식하며 생활비를 줄일 요량으로 1883년 12월 양친이 있는 누에넨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는 예전같지 않았다. 고흐는 그러한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개는 이곳에 돌아온 것을 후회한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황야를 떠돌때도 이 집에서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이때 고흐는 유화를 처음 접했으며, 곧 유화에 심취했다. ‘진정한 화가는 캠퍼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캠퍼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 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에 돌려 놓아야 한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