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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체크] 홍난파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
홍난파, 친일 행적 부인할 수 없지만 ‘탁월한 업적’ 기려야
항일 의미 담은 ‘봉선화’ 등 국민 애창 40곡 중 5곡 작곡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땐 퍼스트 레이디들 ‘고향의 봄’ 불러
영면지 종로구 ‘홍난파의 집’선 매년 업적 기리는 음악회 개최
정작 탄생지 화성에선 배척, 화성시의원들 ‘꽃동산 추진’ 움직임
이미 1만3,000평 부지 확보, 추진하면 ‘문화 메카’ 가능
 
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  2020/08/2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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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 생가 모습.  © 화성신문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김형준이 쓰고,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홍난파(본명 홍영후, 1898~1941)가 작곡한 봉선화’(1920)3절 가사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암울한 상황을 가장 절망적으로 표현해 민족의 주제가라는 평가를 받는 노래다.

 

봉선화는 3절로 구성돼 있다. 울밑에서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한여름의 애절함을 표현하고 있다면,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끝나는 2절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의 슬픔을 담고 있다. 3절은 비록 모진 찬바람에 형체마저 사라져 버렸을지언정 혼백은 길이 남아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그 애절한 민족의 국권 회복 염원을 담고 있다.

 

일본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하면서 항일 의미를 담은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하지만 한()이 서린 민족의 노래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홍난파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서 해방을 맞기 전인 1941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도에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홍난파는 봉선화고향의 봄’(1929) 등 동요, 기악곡인 애수의 조선’(1927)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다. ‘악전대요같은 음악관계 서적과 조선가요 백곡집같은 작곡집도 발간했다. 소설 처녀혼’(1921)과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1923)과 에밀 졸라 원작의 나나’(1924) 등을 출간했다. 이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글과 평론을 많이 발표하였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홍난파가 작곡했다는 사실은 몰라도 성불사의 밤’(1932)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로 시작하는 봄처녀도 마찬가지다.

 

 

▲ 최초의 한국 가곡인 '봉선화'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기악곡을 작곡한 홍난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화성신문


  

친일 논란에 보류된 고향의 봄 꽃동산조성 사업

 

홍난파 선생은 한국 최초의 서양 음악가다. 최초의 한국 가곡 봉선화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기악곡을 작곡했으며, 연주와 평론 등 모든 음악의 장르에서 선구자였다.

 

예술의 전당이 조사한 국민애창곡 40곡 가운데 다섯 곡이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다. 그 다섯 곡은 봄처녀’(4), ‘봉숭아(봉선화)’(5), ‘옛 동산에 올라’(22), ‘사랑’(24), ‘성불사의 밤’(27)이다. 또 홍난파가 작곡한 동요 중 50% 이상이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화성시가 2004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화성시민을 대상으로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에 대한 찬반 여론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 정도(88.5%)가 찬성했다. ‘고향의 봄 꽃동산내에 건립될 홍난파 선생의 자료관에 음악적 업적과 함께 친일 행적을 함께 전시할 경우 찬성 비율은 83.5%였다. 여론조사에는 1,024명이 참여했다.

 

화성시는 이를 토대로 2006년부터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2010년까지 생가(남양읍 홍난파길 32) 주변 토지 51,659를 사들였다. 2012년도에는 조성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키로 결정, 1단계인 도로부지 매입 및 진입도로 조성(시도 15호선 도로확포장공사)을 완료했다.

 

이후 2단계(사업부지 조성 규모 재검토)3단계(사업부지 시설 건립)를 순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2016년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대로 사업 추진이 보류됐다. 이후 사업 재추진이 검토됐으나, 지난해인 2019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중앙정부 등의 과거사 정리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재차 보류됐다.

 

 

▲ 홍난파 생가 안쪽 벽면에 걸린 액자들.  © 화성신문

 

 

친일반민족행위자보고서 명단에 어떻게 등재됐나

 

홍난파는 한국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광복회에서 책으로 발간한 692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홍난파 이름이 없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던 200911,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홍난파 포함 1,006)됐다. 이에 홍난파 후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조사결과통지처분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홍난파를 제외한 1,005명의 이름이 담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가 발간됐다.

 

서울행정법원은 결정문(20091117)을 통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한 결정은 친일반민족행위조사결과통지처분취소 사건의 판결 선고시까지 그 효력을 정지한다고 주문했다. 이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족진상규명보고서명단 중 홍난파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는 ‘09. 11. 17.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효력정지 신청이 인용된 상태임이라는 글만 적힌 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보고서 인쇄가 들어가기 이틀 전에 법원 판결로 극적으로 유일하게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이다.

 

 


 

홍난파 이름이 빠진 보고서가 배포된 상황인데다 진상규명위원회 임무가 끝나고 해체된 상황에서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원고와 피고는 서로 실익이 없다는 판단 아래 상호 합의하에 처분취소 소송을 201011월 취하했다. 법적으로 종결된 것이다.

 

하지만 7년 후인 2017적폐 청산을 기치로 내건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해 12월 홍난파 이름이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이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의해 발간됐다. 다 끝난 일인 줄 알았던 홍난파 유족으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법률적인 판단의 최종 정점이 법원임에도 불구하고, 행정관서가 판단을 내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 홍난파 생가 마당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부지를 확보해 놓고도 사업추진이 보류돼 방치돼 있다.  © 화성신문


  

홍난파의 친일 행적, 주장과 반론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홍난파 결정 이유서에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 기구의 주요 외곽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기록돼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홍난파의 친일 행적으로 군가 및 친일 가요 작곡(‘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 ‘희망의 아침’), 경성중앙방송 관현악단 지휘, 사상전향서 발표(19371124, 사상전향서 작성은 114),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활동,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 문화위원 활동 등을 꼽는다.

 

이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 행적 주장에 대해 홍난파 유족측은 친일 행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반론을 펴고 있다.

 

홍난파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이었다. 수양동우회는 춘원 이광수가 조직한 수양동맹회와 도산 안창호의 대성학교 및 물산장려운동 관련자 친목모임인 동우구락부가 통합돼 탄생한 단체다. 계몽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19376월부터 19383월에 걸쳐 181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일명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홍난파도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72일간 고문을 받았다. 모진 고문 끝에 대부분의 회원들과 함께 사상전향서를 작성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사상전향서도 직접 쓴 것이 아니었다. 일본 경찰이 만들어놓은 인쇄물에 사인을 하는 형식이었다. 본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압에 의한 사상전향서였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늑막염이 재발했고, 2년 후에 사망했다.

 

홍난파 유족측은 군가와 친일 가요를 작곡한 것은 총독부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관현악단 지휘와 음악활동은 음악가로서 당연한 활동이었다고 반론한다.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고 끝나는 사상전향서는 친일파였다면 불필요한 반성문이고, 오히려 친일파가 아니라는 반증이라는 것이 유족측 입장이다.

 

홍난파는 20049월 제정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서 친일 행위로 규정한 악질적인 사람, 항일운동을 한 사람에게 악행한 사람, 일본 정부에 특별히 정치적으로 아부한 사람 등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 홍난파 생가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  © 화성신문


  

현실에서 희망을 보다

 

홍난파는 1941년 종로구 홍파동에서 서거했다. 홍난파의 집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90)으로 지정돼 있다. 홍난파에 대한 시청각 교육시설로, 유치원생과 초중고 학생들 견학 장소로 활용된다. 서울시청이 관리비를 지원한다.

 

홍난파의 집에서는 매년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회가 열린다. 종로구가 주최하고, 홍난파의 손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이 주관한다. 2개월 전인 올해 626일 열린 음악회는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됐지만, 우리 가곡 100주년 기념을 맞아 광화문아트홀에서 예년보다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

 

현재 국무총리인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전 국회의장도 매년 음악회에 참석해서 인사말을 했다. 영면지인 서울 종로구에서는 홍난파의 업적을 기리는데, 정작 중요한 탄생지에서 배척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8년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 선언에 이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만찬장에서는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퍼스트 레이디인 김정숙 여사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계몽주의자였던 홍난파는 북한에서 위대한 민족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인 2019년은 3.1100주년 되는 의미 있는 해였다. 전국에서 개최된 음악회마다 봉선화가 불렸다. 항일 운동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

 

 

▲ 홍난파 생가 인근 도로에 세워진 표지판.  © 화성신문



 

키 쥔 화성시, ‘문화 메카이정표 보이는 갈림길에 서다

 

지금은 문화의 시대다. 문화의 핵심은 음악이다. 경기도와 수도권에는 수많은 음악단체가 있다. 음악애호가들도 많다. 홍난파 탄생지 활초리가 있는 화성시가 문화 메카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고향의 봄 꽃동산조성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난파기념관, 근대 서양음악 역사박물관, 가곡 작곡가들 작품 보관소, 시청각 교육실, 기념품점 등을 복합적으로 조성하면 명품 음악교육장과 관광명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각 음악대학과 연계하면 멋진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고향의 봄 꽃동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 화성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서 화성을 홍보하는 효과도 대단할 것이다.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에 들어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 수도 있다.

 

 

▲ 광복회가 2002년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책자 표지.  © 화성신문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책자에 게재된 윤경빈 광복회 회장 발간사.  © 화성신문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20번에 등재된 미당 서정주 시인. 작곡가 홍난파 이름은 빠져 있다.  © 화성신문


 

화성시는 이미 토지 13,000평을 매입한 상태다. 한창 홍난파 친일 시비가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찬성여론이 88.5%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화성시의원 대여섯 명이 여야를 막론하고 꺼져가는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 사업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라북도 고창군이 부럽다. 미당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시문학관이 있기 때문이다. 고창군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다. 서정주 시인은 특별법에서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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