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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121]
화성시(華城市)를 사랑하며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1/10/2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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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석협성대학교 교수     ©화성신문

 필자가 일하고 있는 협성대학교의 주소는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로’이다. ‘봉담’이라는 지명과 ‘최루백로’라는 명칭의 유래를 화성문화원이 진행하는 ‘화성의 전설: 방구석에서 떠나는 랜선 여행-봉담편’에서 알려주고 있다.

 

봉담면은 삼봉면과 갈담면이 합쳐지면서 삼봉면의 ‘봉’자와 갈담면의 ‘담’자를 조합하여 ‘봉담’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최루백로’는 봉담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최루백의 아버지는 사냥하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최루백은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도끼를 들고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 그 호랑이를 찾았다. 옛말에 호랑이가 인육을 먹게 되면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산기슭에 오른 최루백은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큰 바위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인 호랑이 머리를 도끼로 힘껏 내려쳤고 호랑이는 죽었다.

 

최루백은 호랑이의 배를 가르고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홍법산 서쪽에 안장하고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삼 년 거상을 마친 최루백은 항아리에 묻어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꺼내 씹어 먹었다. 최루백의 이야기는 널리 퍼졌고, 나라에서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를 세워 주었다.

 

어느 곳의 역사와 유래를 알게 되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고 더 깊은 애정이 솟아날 수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드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자신의 우물을 알려고 하지 않고 우물에서 보이는 하늘만 동경하는 것도 문제다. 글로벌 시대에 화성인으로서 화성 지역에만 갇히는 것도 문제이지만, 화성을 잘 모르면서 화성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화성’이라는 지역에 낯선 사람도 ‘제암리’라는 지역에는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3.1 운동하면 개인적 인물로는 유관순이 떠오르나 공동체(집단) 사건으로서 제암리 교회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1919년에 일제의 만행으로 일어난 제암리 교회 사건을 다시 보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교회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했지만 제암리 교회 사건이 두드러지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보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암리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19년 4월 15일이었으며, 4월 28일에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에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총영사관 영사 커티스, 그리고 AP통신 경성 특파원 테일러 일행은 경기도 장안면 수촌리 마을이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촌리로 가는 도중에 발안리에서 점심을 먹으며 제암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전날 제암리가 일본군에 의해 전멸되었다는 이야기를 마을 주민들로부터 전해들은 이 일행은 제암리로 향했다. 학살 현장을 목격한 후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를 본국에 보고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원인 중의 하나는 세계적인 OTT 서비스를 제공하는 ‘넷플릭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제암리 교회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보고서로 작성되고 해외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화성문화원에서 유튜브를 통해 진행하고 있는 ‘화성의 전설’ 프로그램처럼 화성의 역사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이 가을처럼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 

 

제암리에는 한말 무렵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감리교)가 들어왔다. 제암리 교회 사건에서 사건 현장은 감리교회이었지만 희생당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었다. 천도교인들도 있었다. 일부 기록은 제암리 교회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인 것으로 제시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희생자들은 홍원식, 안종후, 안진순 등 감리교인 12명과 안정옥, 안종환, 안종린 등 천도교인 11명으로 이루어졌다.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종교가 천도교와 기독교이었듯이, 제암리 사건에도 천도교인과 감리교인이 희생을 당했다. 민족의 과제인 독립을 위해 천도교와 감리교는 종교 간의 갈등을 빚은 것이 아니라 서로 이웃 종교로 인식하면서 손과 손을 맞잡았다. 

 

화성시에는 6만 명의 외국인 주민이 살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다양한 나라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국에서 베트남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가 화성시다. 필리핀인, 네팔인, 캄보디아인, 인도네시안, 미얀마인, 스리랑카인, 방글라데시인 등 주요 9개 국적의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도 화성시다.

 

이제 화성시는 국적별 다양성에서 실질적으로 안산시를 뛰어넘는 제1의 이주민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한스 큉(Hans Küng)이라는 신학자는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다인종·다문화 도시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화성시에 종교 간 평화 없이 화성시의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chanse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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