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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141]
선거와 민의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2/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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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민 노작홍사용문학관 사무국장     ©화성신문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실은 정치의 한낱 조건일 뿐이다. 4~5년 정도의 주기로 이뤄지는 선거 이외에도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인 정치 참여의 행위는 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거는 민중의 의사를 대의하거나 대표하기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제도이기도 하다. 선거라는 제도는 언제나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유권자의 20~30% 정도는 투표를 포기하는데 그 중에는 아예 선거권이 박탈된 계층도 있다. 

 

물론 이런 비율조차 대선 기준이고, 지방선거나 총선은 보통 투표율이 더 낮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투표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가령 이번 대선에서도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선거 공보물 제작이 미흡하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 봐도 좋겠다. 

 

발달 장애인을 위한 투표 보조도 제한적이었고, 투표 용지 조차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어 이번에도 그들에게는 ‘깜깜이 선거’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론 투표에 참여하기 어려운 병원 노동자들이 참정권 보장을 위해 집단적으로 호소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사전 투표나 부재자 투표와 같은 제도적 보완이 없지 않지만, 이처럼 선거라는 제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민의’가 선거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어느 선거에서든 대다수의 승자들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과반 정도의 민의를 마주해야만 한다. 정치인에게 ‘겸허할 의무’가 주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서 ‘표심’을 온전한 ‘민의’이자 ‘민심’으로 이해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소멸의 흉기’로 돌변하는 사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의 본질을 바로 이 점으로부터 확보하려고 했다. 즉 정치 참여와 배제의 ‘경계’를 식별하고, 그러한 ‘경계’의 유동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살펴본 것이다. 그는 『감성의 분할』(2008)에서 ‘공통적인 것(정치)’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공간들, 시간들, 그리고 활동 형태들의 분할에 주목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시민들은 언제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로 여겨지지만, 실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결정하는 모종의 분할은 미리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참여와 배제의 분할에 대한 역사는 유구하다. 이를 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동물(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예는 언어를 이해할 지라도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 외에 다른 것에 헌신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정치)에 애초부터 개입할 수 없었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랑시에르는 ‘노동’이란 개념도 다시 정의했다. 노동은 단순히 물자를 얻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참여할 시간이 부재하다는 감성 분할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장애’라는 개념 역시 신체나 정신 능력의 결손이면서 동시에 ‘정치 참여에의 결함’이라는 ‘강제된 의미’가 덧붙여 질 수도 있겠다. 이런 암담한 현실이 여전하기에 랑시에르는 정치 참여와 배제 사이의 경계들을 정립하는 사회적 좌표를 재배치하고, 논쟁적으로 재형성할 수 있는 해방의 기획을 통해 정치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선이라는 큰 선거가 끝났지만, 이제 그에 못지않은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선거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차등적으로 구분케 하는 정치 참여의 원리이다. 부디 승자들이 자신의 ‘표심’에 반영되지 않은 패자들의 ‘민의’를 포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 주길 기대해 본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다시 한번, 또 믿어 본다.

 

master@noj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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