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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 136]
2022년,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2/02/2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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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원 청운대학교 문화예술경영마이스학과 외래교수  © 화성신문

지난 2년의 회한

지난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 지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낭비일까? 바보일까? 끔찍하게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시간, 일들도 많다. 인간은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지난 일들은 기억의 저 깊은 곳으로 점점 침잠하게 되고, 더 긴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려고 애써도 기억나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시작된 코로나19, 그리고 그로 인하여 벌어진 2년 간의 여러 상황은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조차 자꾸 되살아나서 힘들어 할 것이다. 병마에 시달린 고통스러웠던 시간, 혹시 가족을 순식간에 잃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약한 인간에게 형벌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바이러스 균은 어디서 온 것일까? 태초에 있던 것이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활동을 개시한 걸까? 없던 걸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우리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의 과정에서 이제는 맞이해야 할 필연이었을까? 어쨌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맞이해야 했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

 

4대 강변에서 시작되었다는 인류 문명은 수천 년이 지났지만 허술하기 그지없고, 어쩌면 인류를 점점 멸망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성 탐사는 혜안을 갖은 이들이 수명을 다한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발악은 아닐지 싶은 생각도 든다. 

 

지금은 밤하늘의 오로라를 보고 있는 것

방역 패스는 해야 한다 아니다. 거리 두기는 완화해야 한다 아니다. 백신은 반드시 맞아야 한다 아니다. 맞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맞으면 안 된다. 의사가 하는 말이니 믿어야 한다 아니다 믿을 수 없다. 사람마다 그 입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생각이 다르면 나와는 맞지 않는 다른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가름을 한다.

 

O, X가 표시된 원안에 선택적으로 들어가도록 문제를 내면 소수가 남거나 없을 수도 있다. 설령 소수가 남는다고 해도 명확히 알기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다. 누구도 명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오로라가 보인다고 해서 계속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오로라는 한 순간도 같은 형태가 아니다. 찰라(札剌)의 시간조차도 짧다 할 만큼 움직이고 변한다. 무엇이 맞는 것이고 무엇이 실체일까? 또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지금 오로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그것을 실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 이름하여 왔다. 우리는 오로라를 보고 있음에도 그 현상을 진리라 하지 않는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착시의 시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라 하는가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으려 한다. 주제에 따라서는 매우 긴 시간 동안 논쟁을 해야 하는 문제이고 정답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올 것이다. 안토니 가우디는 창밖 정원의 나무를 스승이라고 했다. 각자의 가치관의 문제일 것이다.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나 현상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따라 정상의 범위를 정하고, 범위 밖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는 비정상이라고 해 왔다. 이것이 보편적 진리다. 화자와 같은 생각이거나 비슷하면 옳고 그름과는 관계가 없다. 같은 편이고 정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고 다른 편으로 가름하니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지금은 어떠한가? 보편적 진리보다, 의학보다, 과학보다 더 정상은 무엇이라고 치부되고 있는가?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았다가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착시현상에 빠지고 말 것이다. 

 

희망의 길은 무엇일까?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상처를 받고 입히면서 존재해 왔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연이 인간에게 주고받은 상처를 어찌 헤아릴 수나 있을까 싶다. 이러한 상처 뒤에 남는 것은 원형치유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한심하게도 끊임없는 상처를 주고받는다. 2022년, 우리에게 희망의 길은 무엇일까? 그 길은 하나일까? 여러 개 일까? 필자는 이제 그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합리적 이성을 준거로 삼으며 말이다. 

 

누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것인가?

“어떤 사람을 공적인 책임 있는 자리에 다른 사람보다 위에 둘 때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그의 실제적인 능력입니다”고 한 2500년 전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식 연설문(BC 431)을 읽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다.

 

contle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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