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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201]
100세 시대 선입관을 바꾸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7/3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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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락천 (주)동부케어 대표이사/온맘터치협동조합 이사장     ©화성신문

103세로 국내 최고령 철학자이자 수필가이며 103세에 책을 내는 흔치 않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호칭보다 교수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연세대 김형석 교수. 그는 인생에서 80세까지를 장년이라고 규정한다. 살아보니 65세에서 80세까지가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몸은 늙지만 지력은 노력하면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35세에 연세대 교수로 갔을 때 은퇴하는 선배가 ‘칠판을 바라보며 30년, 등지고 30년 살고 나니 인생이 끝났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은퇴하고 나서 더 바쁘게 많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김 교수는 100세가 지나니 고유명사가 바로바로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좀 늙은 것 같다”며 웃었다.

 

2022년 3월 20대 대통령 사전투표일에, 나는 투표소 앞 긴 줄 안에 서 있었다. 코로나의 끝물이라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아직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남들처럼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 뉴스를 보면서 지루함을 이기며 서있었는데, 문득 투표 진행을 돕는 참관인이 도움을 청했다.

 

"107세 유권자가 오셨습니다. 차례를 양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나 아닌 누구라도 이런 양보를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표정과 몸짓으로 기꺼움을 최대한 드러내 보이며,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하러 오신 107세 유권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어르신을 보고 나는 내가 뻔하고 고루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그분이 들것이나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아주 세련된 옷차림으로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았고 지팡이조차 짚지 않았다. 다소 천천히 걷기는 했지만 앞선 안내가 없었다면 나는 그분이 90대쯤 되셨으려니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런 짐작조차 하지 않고 그분에게 어떤 관심이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분은 107이라는 깜짝 놀랄 숫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노인 중 한 분일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90년 10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는 87이라는 숫자가 지금의 107처럼 들렸다. 107세 유권자와 나의 할머니를 겹쳐 떠올리면서 나는 그 사이 사람의 수명과 노년의 활력 수명이 함께 길어진 것을 실감했다. 누구나 칭송할 만큼 장수하고 세상을 떠나신 나의 할머니는 107세 유권자처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운신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금이 붙으면 안 뒤야."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바지런히 움직였다. 오금이 붙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왔고 쑤시는 어깨를 풀기 위해 관절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니 손녀에게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하셔도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몸을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움적 거리면 뒤야."

 

할머니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불평하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었다. 나쁜 일이 있어도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을 한나절 이상 길게 가져가는 일도 없었다. 한숨 한 번 쉬고 나서 몸을 움적 거리는 것으로 할머니는 노년에 닥쳐오는 어려움을 모두 이겨냈다. 씩씩하게 약수터에 오르고 쑤시는 어깨를 혼자서 풀던 할머니는 단 하루도 몸져 눕지 않고 어느 날 잠자듯 세상을 떠나셨다. 조촐하게 욕심이 없던 할머니가 거두신 생의 마지막 승리는 그 고요하고 갑작스러운 떠나심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시즌이 시작되지 않았던 어느 10월의 맑은 날에, 나와 우리 삼형제, 그리고 누나들은 할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사랑이 많으셨던 우리 할머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 할 수 있다. 산소로 향하는 야트막한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큰고모, 둘째 고모, 아버지, 어머니의 살다 가신 나이를 떠올려 보았다, 나이를 더하면 279, 엄마까지 더하면 371년이라는 놀라운 시간이 조용히 내 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큰고모가 가벼운 지팡이를 짚었을 뿐 모두 씩씩하게 살다 가셨다. 

 

이제는 당신보다 더 긴 시간을 살다가 가야 하는 손자들에게 땅속에서 할머니는 다시 한번 조용히 속삭이셨을지도 모른다. 오금이 붙으면 안 뒤야, 움적 거리면 뒤야. 그분의 손자된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노년의 시간이 얼만큼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으로 수렴될 것이다. 오금이 붙지 않게 바지런히 움직이고, 속상한 일들은 몸을 움적거려 날려보내면 된다.

 

dongbuca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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