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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읽는 세상 9] 말의 파도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1/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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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비담시인. 한국작가회의 화성시지부     ©화성신문

며칠 전 티비 보도에서 기자가 사용하는 말 하나가 귀를 훅 치고 들어왔다. 한미일이 북핵 대표 간 협의를 하고 이와 관련해 북한과 러시아도 회담했다는데 이를 두고 러·북 대표회담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북·러회담이 아니라 러·북회담이라니…. 

 

외교관계와 국제회의 명칭에서 국가 이름을 나열하는 순서는 자국과의 친소나 은원 관계를 반영한다. 미국은 자유민주 체제의 동맹국으로서 확실한 앞순위인데 일본은 자유민주 체제의 일원이긴 하지만 식민지배의 구원에다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석연치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밀접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엔 적이었고, 지금도 ‘주적’인 북한과 같은 이념으로 복잡다단한 관계에 얽혀 있다. 북한은 우리 영토, 우리 민족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북미·북일·북러 등으로 맨 앞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런데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과 러시아를 ‘러시아-북한’ 순으로 부르면서 핵과 미사일로 끝없이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을 무조건 우선순위에 언급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남한을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부르면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동북아 3국을 ‘한·일·중’으로 불렀다가 귀국 후 국무회의에서는 ‘한·중·일’로 부르는 등 필요에 따라 순서를 바꾸면서 자의적인 메시지를 발신한다. 말이 파도치는 시절이다.

 

 

아직 바다/ 사이키물방울들이 목구멍을 넘어와/ 말이 넘칠 것 같아/ 탬버린 끝에 출렁이는 음표를 타 넘으며/ 크라잉넛의 말들은 힘차게 달린다/ 말의 파도가 몰아치네, 힝힝 울고// 한 해가 한꺼번에 몰려와/ 하룻밤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역사의 세밑/ 퍼즐처럼 꼬이는 혀들/ 말이 하얗게 부서진다/ 누가 흰 말을 푸른 말의 등에 태워 해안으로 몰았나// 몰아낸 말들이 가둔/ 텅 빈 우리// 말이 없을수록/ 지나온 말의 상한 연골뼈들 튀어나와/ 자갈돌처럼 굴러다닌다// 이번 해도 이곳을 보내지 못할 것 같니?/ 우리 촛농처럼 슬펐을 때 같이 물을 마시고/ 달력의 불안한 숫자들 나누어 가진 적 있던/ 바다// 너와 나의/ 부서진 말들 달아나서/ 어디로 갔는데// 말없이 털썩 주저앉아// 오래된 바닥을 파면서? 

 

(전비담 시 「말의 파도」 전문)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담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니라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음을 말하면서 아이히만의 죄는 바로 비판적 사유의 무능에 있다고 한다. 

 

언론이 권력의 필요에 따라 파괴하는 말의 어법을 비판적 성찰 없이 받아쓰거나 그것이 어느 쪽이든 맹목적 이념 추종으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권력에 복무한다면 그 또한 아이히만의 죄과를 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언론의 말은 국민의 정서를 돌아보지 않고 특정 권력의 호불호와 이해관계의 필요에 따라 조어되는 어법을 그대로 받아써야 하는가. 민족을 화합 평화의 길로 끌어가기보다 주적으로 규정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특정 정권의 자의적인 조어법을 그대로 베껴 쓰는 언론에 아이히만의 무지와 무사유의 죄과, ‘악의 평범성’의 해악에 대한 각성이 또다시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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