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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원, 친일 용주사는 손 떼라
 
주찬범 화성시문화재단 이사 기사입력 :  2013/04/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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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 군대는 일제에 의해서 강제 해산됐다. 애국군인들은 장렬
하게 저항하다, 의병에 합류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수원과 화성에서도 그들의 항일투쟁은 활발했다.

1907년 '대한매일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기사가 게재됐다.
1907년 9월 12일 의병 수십 명이 용주사에 방문해 점심을 요청하자, 용주사 중 한명이 쌀을 구해 오겠다고 속이고 수원 소재 일본 군에 밀고해 일본군 50명이 용주사에 쳐들어와 의병들을 포박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용주사는 1907년부터 2007년까지 100년 간 융·건릉 제례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다 효역사문화공원(구 효테마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던 2008년부터 슬그머니 참가한다.

용주사의 친일매국 행위는 일제 강점기 36년간 내내 지속됐지만, 특히 1911년부터 1942년 사이 '강대련'(1895~1942)이 주지로 재임하던 시절 극에 달했다.

강대련은 조선과 일본의 중들을 상대 국가의 왕족이나 귀족 여성들과 결혼시켜 주면, 양국 화합에 공헌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다, 1922년 애국승려들에 의해 종로바닥에서 ‘불교계 대 악마 강대련 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조리 돌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모욕조차도 친일의 훈장으로 자랑하며, 스스로 ‘명고산인’이라는 별호까지 짓는다. 덕택에 그는 2007년 12월 6일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명 중에 이완용,송병준 등과 함께 수록됐다. 

또 용주사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말사들 승려까지 총동원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본군의 ‘무운장구축원문’을 불전에 봉독하는 한편, 조선인의 징병·징용·정신대 지원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동아 건설에 1억 민중은 정진불퇴’ 라고 조각한 보탑을 절 앞 광장에 10개나 건립했으며, 침략전쟁을 후원하기 위해 거액을 조선총독부에 헌금하는 등 친일매국에 광분했다.

괴로운 진실이다.

지난 세월, 불교계 표를 앞세운 용주사가 ‘효’ 정신이나 역사 혹은 문화를 논했던 것 자체가 ‘민족모독’이었고, 선택적인 친일처단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사회의 비겁을 조롱하는 발칙함이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쳐도 범죄이듯이, 아무리 우리의 ‘효’정신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친일사찰 용주사가 앞장서면, 도리어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자해하는 행위일 뿐이다.

용주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효역사문화공원(구 효테마공원)이 아닌, 1907년 용주사의 밀고로 용주사 앞마당에서 일본헌병들에게 잡혀간 대한제국 의병 수십 위 호국영령 앞에 석고대죄 하는 것뿐이다.

아울러 ‘효문화역사공원’ 조성사업에 친일사찰 용주사의 개입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만 손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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