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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비벼댈 언덕이 그립다
 
김재철 (향남읍 발안리) 기사입력 :  2013/05/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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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초 이사 올 때 가지고 온 70년 대 귤 골판지 상자를 열어보니 아버지의 책들이 몇 권 눈에 띠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책들이지만 상자를 열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이다.

아버지의 일제시대 보통학교 통신부, 졸업앨범은 이미 국민학교 시절에 섭렵하고, 광동서국 한일해석옥편(1916), 이 옥편은 내가 중학시절 쪽 헤어진 부분을 스카치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여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책주(冊主)인 아버지 성함이 쓰여 있는 박문서관 천자문(1917). 

다음은 1932년 BA형 시보레 해설서이다. 일본 시보레 모타스 주식회사에서 발간한 해설서로 표지에 시보레 특약판매점 경성모타스주식회사 경성고시정(京城古市町) 이라는 고무인이 찍혀있다. 아직도 깨끗한 상태다. 아버지가 일제시대 시보레를 모는 사진이 남아 있어 아버지가 보시던 해설서임에 틀림없다.

고시정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확인해 보니 지금의 동자동인데 남영동 관할 하에 있다고 한다. 1910년 8월 종로를 왕복하는 최초의 복선 전차가 가설된 곳이다. 1934년 서울역 건물 1층 조선자동차주식회사 앞에서 단체 촬영한 아버지의 사진이 있어 경성모타스주식회사 위치는 아마 서울역 근처이었던가 싶다.
 
조선자동차교통협회 발간 조선자동차관련법령집(1938). 이 책에는 해서체의 아버지 도장이 찍혀있다. 어려서부터 눈여겨 왔고 나도 장성하면 이런 멋진 서체의 도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만 못하다. 애지중지 간직한 이 조그만 도장이 70년 이상 된 것이다.

하지만 인주가 함께 있는 휴대용 도장집은 일부 파손되어 직접 수선하려 시도하였지만 포기하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제시대 연감(1942) 한권과 일본어판 창업50주년 기념 바이엘 의가연감(醫家年鑑 1938 바이엘약품합명회사학술부) 한권도 함께 있다.

간직하고 있던 몇 권의 책들은 지금 들춰보아도 기억에 새롭지만 중학시절부터 보아왔던 고르돈 알렉산더 저(著) 정영호 역(譯) 1957년판 ‘대학생물학’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를 준다.

책 표지 안쪽에는 아버지의 성함에 혜존이라는 펜글씨와 저자근정 고무인이 찍혀 있다.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아버지께 여쭤보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하다. 단지 생물학에 약간 취미가 붙은 고등학교에 가서야 책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그 책 때문에 내가 대학의 관련 학과를 나왔다는 것은 견강부회가 될 수 있다. 혹시나 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니 정영호(1924)는 중화민국 난징(南京)국립중앙대학교 이학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녹지자연도 개념을 처음 도입, 체계화하여 전 국토의 녹지자연도 완성을 주도했으며 자연보호운동에도 앞장섰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작고’로 되어있다.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농촌마을 답십리 출신이신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 이야기 할 때면 가끔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라는 속담을 어린 나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그때는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다. 어버이 날. 새삼 그 펑퍼짐한 언덕에 막무가내로 등을 비벼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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