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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칼럼3]
할머니의 마당 공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3/1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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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화성신문

마을에 들어서면 긴 고샅이 나온다. 고샅 끝에 할머니의 집이 있다. 문을 열면 좁은 고샅이 확 트이는 너른 마당을 펼쳐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탈곡을 하고, 고추를 말리고, 전통 혼례를 올리기도 하던 공동의 마당이다. 뒤란에 물맛 좋기로 이름난 우물이 있어서 수도를 놓지 못한 몇몇 집들은 물을 퍼 나르기도 하였다. 고샅에서 놀던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땐  어지간한 실내 축구장 부럽지 않은 운동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 널찍한 마당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할머니는 대문에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아 놓고 마실을 다녔다. 대처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거나 병원 신세라도 질 때는 딱히 누구라고 정한 바 없이 숟가락을 따고 들어와서 소의 여물을 주기도 하고 강아지의 밥을 대신 주고 가기도 했다. 채마밭에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는 일은 일종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밭에서 막 딴 물외나 가지를 툇마루에 올려놓고 휑한 마당의 검불이라도 쓸어보면서 빈집을 둘러보는 일은 할머니의 부재가 속히 끝났으면 하는 마을 사람들의 비원이었으리라.

 

내가 어슴프레하게나마 마당을 이해하게 된 건 몇 차례의 엄중한 경고를 받은 뒤의 일이다. 서리가 내린 가을 아침 나는 무쇠솥에 펄펄 끓인 물로 고양이 세수를 끝내자마자 세숫대야의 물을 그냥 땅바닥에 부었다. 이내 대노하신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물을 식혀서 버려야지 땅속에 있는 벌레들은 어쩌라고 그런 것이냐. 너 자는데 용암물이 떨어지면 꼴이 볼 만하겠구나. 저 놈이 커서 뭐가 되려고 저렇게 싹수가 없는지 모르겄어잉.’ 땅속의 미물들과도 공생을 해야 한다는 뜻을 할머니는 그렇게 가르쳤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뭔가 무료함을 달랠 놀이를 찾고 있던 나는 낫으로 무심코 마당을 찔렀다. 바닥에 닭을 그려보고 싶었을 것이다. 마침 정지에서 나오시던 할머니가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이번의 역정은 짐짓 가장을 한 지난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즉발적인 격노에 가까운 것이었다. ‘네 이놈! 손주 놈이 이쁘다 이쁘다 했더니 할머니 등에다가 낫을 찍느냐. 그러다 천벌 받는다.’ 노여움에 가득찬 할머니의 두 눈이  닭의 부리처럼 마구 나를 쪼아댔다. 나는 영문을 몰라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나의 행동거지와 할머니의 노여움 사이에 관계를 찾지 못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가운데도 마당에 함부로 낫을 찍는 일이 천륜을 저버리는 불효막심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받아들여야 했다. 할머니에게 마당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이어진 감각적 실체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만한 생태윤리와 공공선을 배운 적이 없다. 

 

공부의 ‘공(工)’은 본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다. 공부의 ‘부(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조선 명종 때 참찬관 조원수는 공부의 뜻을 묻는 임금에게 ‘공부의 공은 여공의 공자와 같고, 부는 농부의 부자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힘써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라고 했다. 

 

지난 해 백 년을 사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의 행성은 할머니의 마당을 향해 수렴되고 확장된다. 지구별에서 나셔서 지구별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당이야말로 자연과 문명을 명상하는 내 길쌈과 농사의 처음과 끝이 아닌가 한다. 생태적 재앙이 일상이 된 기후변화의 시대에 지금은 없는 마당을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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