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 기고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고]홍난파 다시보기(3)
나소운(羅素雲)이 홍난파인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0/06 [08:19]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신도성 홍난파합창단원 / 시민기자     ©화성신문

홍난파는 다재다능해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어 행하지 않은 일이나 확인되지 않은 일이 업적으로 기록되고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홍난파가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으로 신민요나 대중가요를 작곡하였다는 주장이다. 처음 이러한 주장을 한 분은 아마도 극작가이며 작사가인 박노홍(朴魯洪)이다.

 

 

1980년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가요전집2’에 ①나소운의 본명은 홍영후(홍난파)이다. ② 그는 주옥같은 예술가곡, 동요곡을 많이 써냈다. ③그도 한때 나소운이라는 필명으로 ‘인생은 30부터’, ‘임 실은 배’, ‘고원의 황혼’, ‘이역의 길손’, ‘다녀가 주세요’ 등을 작곡했다. ④ 그가 잠시 대중가요에 손을 댄 이유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전해 들은 일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차 자료나 확실한 배경 설명도 없이 서우석(서울대 음대 교수)에 의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서우석 교수는 가곡과 가요가 선명하게 분리된 증거를 명백히 제시해 주는 사람은 홍난파였다면서, ‘조선동요 백곡집’ 등과 많은 가곡을 쓴 홍난파가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유행가를 작곡했다고 주장했다.

 

1986년 4월 12일에도 서울대에서 개최된 춘계학술대회에서 ① 홍난파의 ‘조선동요 백곡집’의 첫 페이지에 ‘조선의 아이들에게 바치노라’라는 헌사를 보면 이런 상황에 대한 홍난파의 심정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② 1930년대에 홍난파는 몇 곡의 유행가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작곡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란 변명으로 대신한다. ③ 동요와 가곡을 작곡한 그가 당시의 유행가의 윤리성을 긍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홍난파=나소운’ 주장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필자는 우선 새로운 각도에서 홍난파의 제자인 나운영의 자료집에는 어떻게 기록되어있는가 하는 것을 찾았다. 한국음악 100년사를 준비하였던 나운영 교수가 소유하였던 홍난파 관련 악보에서 나소운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우선 신민요 망향곡(望鄕曲)이 나소운 작곡, 을파소 작사로 기록되었으며, 또 한양추색(漢陽秋色) 첫 장에는 나소운 작곡, 홍난파 편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악보에 그려진 서체는 홍난파의 것으로 보이나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보인 홍난파이기에 위의 기록만을 가지고 ‘나소운이 홍난파이다’ 또는 ‘나소운은 홍난파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홍난파의 자료2 악보편을 해제한 장신대 홍정수 교수도 1999년 ‘음악과 민족’ 18호에서 “홍난파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껄끄러운 부분에서도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곡을 밝혔다. 그러기에 이름을 쓰는 난에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은 홍난파의 곡으로 보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홍정수 교수의 의견을 존중한다. 무엇보다도 대중음악계는 ‘홍난파가 나소운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정통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이에 대해서 잘못된 주장이라고 무시하거나 관심이 전혀 없음에 주목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술의 수준이 낮다고 인식되는 대중음악인들은 홍난파와 같은 대표적인 예술가를 끌어들임으로 자신의 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홍난파가 나소운’ 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